우리나라 경제정책 컨트롤 타워인 기획재정부의 젊은 직원 사이에서 요즘 가장 화제인 사람은 최원진(48) 롯데손해보험 사장이다. 행정고시 43회 출신인 최 사장은 기재부 팀장으로 재직 중이던 2015년 10월 사모펀드인 JKL파트너스의 상무로 자리를 옮겼다. JKL파트너스는 작년 10월 롯데손해보험을 인수했고 최 사장을 대표로 앉혔다. 관료를 그만둔 지 불과 4년 만에 최고경영자(CEO) 자리에 오른 게 후배들인 사무관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다.

작년 산업통상자원부 국정감사에서는 부처의 중추인 과장들의 무더기 민간 이직이 논란이 됐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김삼화 의원실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최소 7명 이상의 과장이 민간으로 옮겼다. 이들은 대기업이나 사모펀드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2018년 7월 기획재정부 국·과장급 간부들이 세종시 KDI(한국개발연구원)에서 워크숍을 열고 주요 정책 과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조선비즈가 26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의 퇴직 공무원 취업심사 결과를 전수 분석한 결과, 지난 4년간(2016~2020년) 윤리위 취업 심사를 받은 17개 중앙부처(국방부, 국가보훈처 등 제외) 3급 이하 퇴직 공무원(226명) 중 민간 기업이나 로펌(법률사무소) 등으로 이직한 사람은 56명이었다. 퇴직하는 과장급 관료 4분의 1이 대기업, 대형 로펌으로 이직한 것이다.

과거에는 과장, 국장 이상으로 퇴직한 후 산하 공공기관이나 부처 유관 협회 임원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갈수록 과장급에서 퇴직해 대기업이나 로펌으로 옮기는 관료들이 늘어나고 있다. 2016년 18명이었던 민간 이직 공무원은 2017~2018년에 각각 9명으로 주춤했지만 지난해 20명으로 늘어났다. 공직자윤리위 퇴직 심사 대상이 아닌 사모펀드 등으로 옮기는 경우를 포함하면 민간으로 이직하는 과장급 관료의 숫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민간으로 이직하는 공무원의 소속 부처도 늘어나고 있다. 2016년의 경우 민간 이직자의 절반 이상이 공정거래위원회(10명)에 몰려있었다. 그러나 지난해는 민간으로 이직한 공무원의 소속 부처가 10개로 늘어났다. 2016년 5개 부처에 비해 두 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그래픽= 정다운

민간 기업, 로펌 등으로 자리를 옮기는 공무원이 과거에는 업무 유관성이 높은 공정위, 산업부 등에 국한됐던 반면 지난해부터는 거의 전(全)부처로 확산되고 있다. 민간 기업 이직이 거의 없었던 외교부에서도 이직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지난해 4월엔 김일범 전 북미2과장(외무고시 33회)이 SK그룹 임원으로 이직했고, 이에 앞서 2월에는 김경한 전 외교부 국제경제국 심의관이 포스코의 무역통상실장(전무급)로 이직한 바 있다. 외교부에서는 올해도 해외 근무 중이던 외교관이 민간 기업 이직을 위해 사표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

2016~2018년 3년간 민간 기업 이직이 없었던 환경부에서는 지난해 4명이 민간기업 등으로 자리를 옮겼다. 4월에는 부이사관(3급)이 현대자동차 이사로 이직했고, 12월에는 과장(서기관)이 중견 반도체 공정업체인 한미반도체 이사로 이직한 사례가 있었다. 5월에는 과장급이 산업부 산하 공기업인 한국수력원자력 팀장으로 옮기기 위해 취업 심사를 받기도 했다.

민간 기업과 접촉이 잦아 과거에도 민간 진출이 많았던 산업부에서는 주요 국실 총괄과장에 오를 재목인 행시 41~42회 과장들이 무더기로 SK이노베이션, 한화파워시스템, 한화케미칼, 한화에너지 상무급으로 이직했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앤장으로 이직한 사례도 있다.

한 관료 출신 대기업 임원은 “현 정부의 친(親)환경 정책으로 환경 규제가 강화되면서 주요 대기업에서 환경부 출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다”면서 “과거에 이직 사례가 없었던 부처에서 민간 기업으로 옮기는 사례가 늘어나는 것은 ‘좋은 기회가 있으면 공직을 그만두는 것에 미련이 없다’는 정서가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동료들의 대기업 임원행(行)이 속출하면서, 경제부처 과장들은 민간 이직에 대한 고민을 과거보다 진지하게 한다고 한다. 한 경제부처 과장은 "국장급인 고위 공무원단으로 승진하면 퇴직 취업 심사 기준이 매우 엄격하다"면서 "상대적으로 심사 기준이 까다롭지 않는 부이사관 때가 민간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고민을 자주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조선비즈 설문 조사에서도 과장급 응답자의 85% 이상이 '민간 이직 의향이 있다'고 응답한 바 있다.
 
관료생활의 꽃이라고 하는 과장들이 민간 이직을 꿈꾸는 이유는 현 정부 출범 후 관료사회를 적폐로 몰아붙이는 경향 때문으로 보인다. 설문조사에서도 사기저하(27.2%)가 낮은 급여(33.3%)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응답을 받았다.

그래픽= 박길우

산업부에서는 현 정부 출범 직후 박근혜 정부 시절 청와대 지시로 발전 공기업 사장 인선에 개입했다는 혐의로 인사 실무자들이 구속된 바 있다. 또 이명박 정부에서 자원개발 업무를 한 실무자들이 사퇴 압력을 받아 산하기관 기관장에서 물러나는 일도 있었다.

외교부에서도 북핵 문제 등 문재인 정부 외교 정책에 비판적인 언론사의 ‘빨대(취재원)’를 색출한다면서 차관보부터 과장급까지 미·중·일 라인 핵심 인사 10여 명의 휴대전화를 수거하는 등 감찰을 실시한 적이 있다. 북미 외교를 중시했던 전통적인 외교정책 기조가 현 정부 들어 대(對) 중국, 대북 정책 우위 기조로 변한 것이 이직 분위기에 한 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그래픽= 박길우

현 정부 정책 기조에 대한 불만도 민간 이직 욕구를 자극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비즈 설문조사에 따르면, 과장급 관료들이 정책 수단을 결정할 때 ‘경제활동 자유도 확대(55.1%)’와 ‘정책의 시장 수용성(54.1%)’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가치로 응답했다. ‘현 정부의 국정철학 부합 여부’를 고려한다는 응답은 10.2%에 불과했다. ‘규제 완화’ 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현 정부 국정철학 때문에 ‘타다 금지법’ 같은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과장들을 민간으로 내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 차관급 전직 관료는 “‘정책의 시장 수용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답변이 많은 것은 최저임금 인상 등 현 정부 핵심 정책이 시장 논리에 맞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 준다”면서 “경제 원칙과 거꾸로 가는 정책의 실무 작업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답답함이 민간으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자극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