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癌)은 조기에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인공지능(AI)이 의사와 함께 암을 조기에 발견하면 적절한 치료로 더 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최근 서울 강남구 사무실에서 만난 루닛 서범석(37) 대표는 "루닛의 AI 판독기술을 의사들이 활용하면 판독 속도와 건수가 50% 이상 개선된다"며 "그만큼 많은 환자를 볼 수 있고, 진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루닛은 2013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출신 엔지니어 6명이 창업한 1세대 AI 회사다. 창업 후 5년간 개발한 끝에 2018년 8월 식품의약품안전처 승인을 받은 의료용 AI를 내놨다. 작년에만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 등에서 50만건 넘는 엑스레이 사진을 판독했다. 작년에는 미국 스타트업 분석업체 CB인사이츠로부터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혁신 스타트업 150' 중 하나로 선정됐고, 지난달에는 300억원의 투자도 유치했다. 업계에선 루닛이 국내 첫 AI 유니콘(기업가치 10억달러 이상의 비상장 스타트업)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폐·유방암 진단하는 AI
루닛의 시작은 의료가 아니라 패션이었다. 2013년 창업 당시 사용자들이 올린 사진을 분석해 어울리는 옷을 추천해주는 AI를 내놨다. 하지만 취향에 좌우되는 패션 분야에서 AI는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실패를 딛고 새로 도전한 분야가 의료다. 서 대표는 "1%라도 더 정확도를 높이면 수십만, 수백만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분야가 의료"라며 "AI로 정확도와 속도를 개선하면 큰 변화를 일으킬 것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는 의료용 AI로 사업을 전환할 때 루닛에 합류했다. 서 대표는 KAIST 생명과학과를 졸업하고, 의사가 되기 위해 다시 서울대 의대로 진학한 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 일했다. 하지만 KAIST 재학 때 친구인 백승욱 루닛 창업자의 제안에 병원 대신 루닛을 선택했고, 2018년 대표이사 자리에 올랐다. 백 창업자는 현재 루닛의 장기 미래 전략을 맡는 최고혁신책임자를 맡고 있다.
루닛이 집중하는 분야는 폐·유방암 진단이다. 엑스레이·CT 같은 영상 진단은 치료와 달리 AI 개발용 이미지 데이터를 확보하기 쉽다. 의사가 도입하는 데 부담이 덜하다. 루닛의 첫 AI는 폐 결절 여부를 판독하는 기능만 있었다. 이를 개발하는 데 100만장이 넘는 폐 엑스레이 데이터를 투입했다. 작년에는 폐렴·기흉·폐결핵 같은 다양한 폐 질환을 구분해 파악하는 AI를 내놨다. 유방암 분야에서는 유방촬영술로 찍은 사진을 보고 암 여부를 판단하는 AI를 선보였다. 서 대표는 "현재 폐는 엑스레이 판독 기준 정확도가 99% 이상이고, 유방촬영술은 97% 정도"라며 "사용처가 늘어날수록 데이터가 쌓이고, 기술도 발전할 것"이라고 했다.
◇해외 진출·AI 치료로 확대 노려
어려움은 아직 많다. 국내에선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병원이 확보한 데이터를 외부 서버로 유출하지 못한다. 반면 미국은 HIPAA(의료정보보호법)상 규정만 준수하면 기업이 데이터를 수집해 자사 서비스 개선에 쓸 수 있다. 서 대표는 "한국에서도 점점 개인정보 활용에 대한 논의가 많아지고 있는 만큼 개선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루닛이 AI 유니콘으로 성장하기 위해 선택한 미래 전략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해외 시장 확대다. 이미 멕시코·중동·동남아시아 등의 병원에 AI를 공급하는 데다, 올해는 유럽·미국에 진출한다. 후지필름·필립스헬스케어·GE헬스케어 등 글로벌 의료기기 업체들과 제휴해 영상진단기기에 AI를 탑재하는 프로젝트도 진행하고 있다.
또 진단을 넘어 치료 영역으로 AI를 적용할 계획이다. 암·질병 여부를 판단해주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론 환자의 데이터·유전자 정보를 분석해 최적의 항암제를 추천해주겠다는 것이다. 제약업체들과 신약 개발을 할 때에도 루닛의 AI를 쓸 수 있다. 실제로 의료계에선 "암은 항암제 선택만 잘해도 치사율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본다. 서 대표는 "치료 분야는 아직 연구 단계이지만, 상용화되면 획기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며 "AI로 암을 극복할 때까지 끝까지 가보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