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면 배신자 낙인" 유령도시서 버틴다

조선일보
  • 오로라 기자
    입력 2020.02.14 03:35

    한국 기업들, 통조림·라면으로 끼니 때우며 중국서 고군분투
    한국인 주재원들 정상근무… 중국인 직원들 절반 복귀못해

    공기 감염 우려해 난방도 끈채 마스크·패딩 껴입고 근무
    몸살 배탈 나도 병원 못가고 대중교통 대신 동료끼리 카풀
    "마스크 떨어지는게 가장 두려워"

    13일 오전 8시, 한국콜마 중국 우시(無錫) 공장에 근무하는 박호성(49) 상무는 빈속에 영양바 하나를 챙겨 들고 출근길에 나섰다. 그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공장이 비상체제로 돌입한 뒤 아침을 거르거나 간단하게 때우고 있다. 공장 입구에 도착하자, 하얀색 방역복 차림으로 한 손에 적외선 체온기를 든 직원이 마스크 너머로 눈인사를 건넸다. "36.5도, 들어가세요." '삑' 하고 체온기가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직원의 '출입 허가'가 떨어졌다. 박 상무는 "오늘 후베이성에서 확진자가 전일 대비 1만5000명 늘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지방정부의 정책 변화가 있는지부터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시작된 중국 우한시에서 지난 9일 방역복을 입은 한 자원봉사자가 거리를 소독하고 있는 모습. 중국 현지 기업들이 최근 업무를 재개하면서 중국 내 다른 도시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 주재원들도 잇따라 복귀했지만, 식자재·마스크 등의 공급이 뚝 끊기는 등 환경이 열악하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이 시작된 중국 우한시에서 지난 9일 방역복을 입은 한 자원봉사자가 거리를 소독하고 있는 모습. 중국 현지 기업들이 최근 업무를 재개하면서 중국 내 다른 도시에 진출해 있는 한국 기업 주재원들도 잇따라 복귀했지만, 식자재·마스크 등의 공급이 뚝 끊기는 등 환경이 열악하다. /신화 연합뉴스
    한국콜마 공장이 있는 우시시는 사태의 근원지인 우한과 약 700㎞ 떨어졌다. 1000㎞ 이상 떨어진 베이징·광저우 등 대도시보다 위험성이 크다. 박 상무를 비롯한 한국인 주재원 27명은 지난 10일 업무 재개를 앞두고 '유령 도시'처럼 텅텅 빈 우시시로 전부 복귀했다. 바이러스 공포로 현지 식당은 모두 문을 닫았고, 마트 진열대엔 시민들의 사재기로 남은 물건이 몇 없었다. 현지 주재원들은 "간단한 채소나 고기를 구하기도 어려워, 한국에서 챙겨온 통조림이나 라면 같은 간편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며 "택시나 대중교통을 탈 엄두가 나지 않아 주재원들끼리 카풀로 출퇴근을 하고 있다"고 했다.

    ◇텅 빈 도시에서 살아남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 여파로 중국 내 기업들은 지난 10일 전후로 정상 업무를 시작했다. 설 연휴 동안 한국에 나와 있던 대기업 주재원과 기업인들도 중국으로 속속 복귀했다.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월 1일부터 11일까지 중국으로 출국한 한국인은 2만7050명으로 전년 같은 기간(14만2132명)의 5분의 1도 안 된다. 기업 주재원, 사업가처럼 중국으로 꼭 돌아가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중국행 비행기표를 취소했다는 것이다.

    현지 기업인들은 "생존 게임을 벌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마스크 수급이다. 다롄시의 한인 무역회사 대련유스트실업에 근무하는 이모(31)씨는 "온라인·오프라인 매장의 마스크들이 모두 동나, 정상적인 통로로 마스크를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아파트 부녀회장이 1주일에 한 번씩 마스크 공동구매 신청을 받는 식으로 마스크를 공급받고 있다"고 했다. 신분증 하나당 최대 5개밖에 살 수가 없어, 마스크를 재활용해야 하는 상황도 생긴다.

    13일 중국 장쑤성 우시시 소재 한국콜마 공장 직원들이 출근 전 마스크를 쓰고 줄지어 체온 측정을 기다리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체온이 37.5도 이상인 직원은 곧바로 현지 정부에 보고된다”고 했다.
    13일 중국 장쑤성 우시시 소재 한국콜마 공장 직원들이 출근 전 마스크를 쓰고 줄지어 체온 측정을 기다리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체온이 37.5도 이상인 직원은 곧바로 현지 정부에 보고된다”고 했다. /한국콜마

    살 집이 없어진 경우도 있다.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등록되지 않은 차량이나 외부인의 출입을 철저하게 막고 있는데, 해외에서 귀국했다는 이유로 주재원들이 진입을 거부당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한 한국인 주재원은 "중국 도착 후 짐도 풀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동료 주재원의 집에 얹혀사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사무실 풍경도 바뀌었다. 바이러스가 공기로 감염된다는 불안감 때문에 사무실의 중앙 난방을 작동시키지 못하고, 패딩을 껴입고 업무를 본다. 베이징의 한 대기업 주재원 신모(46)씨는 "예전엔 직원식당에서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었지만, 지금은 도시락을 받아 자기 자리에서 따로 먹는다"며 "협력업체와 많게는 하루에 2~3번씩 있던 회의도 전부 화상회의로 대체됐고, 같은 사무실의 동료들끼리도 말이 아니라 메신저로 소통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했다.

    가장 우려스러운 건 영양 불균형과 큰 일교차로 건강이 나빠지는 경우다. 몸살이나 배탈 같은 작은 병에 걸려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될 확률이 높은 현지 병원에 진료받으러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광저우에서 근무하는 한 주재원은 "출국하면서 상비약을 많이 챙기지 못해 걱정이다"라고 했다.

    ◇중국인 직원 절반이 '격리 상태'

    업무 재개에도 중국인 직원들이 대부분 복귀를 못하는 점도 문제다. 중국 정부가 바이러스 전파를 막기 위해 외지로 나갔다 온 사람들은 모두 2주간 격리하라는 지침을 내린 탓에, 기업마다 '인력난'이 일어난 것이다.

    중국 장쑤성 쑤저우시에 있는 한 자동차 부품 제조 업체에 근무하는 김모(53)씨는 "한국 직원 20여명은 설 이후 모두 복귀했지만, 중국 현지인 직원 1500명 중 복귀한 사람은 300명에 불과하다"며 "한국 관리자들이 4~5명분의 일을 하는 비상 업무체계로 돌아가고 있다"고 했다. 코스맥스도 현재 20여명의 한국인 주재원은 모두 정상 근무 중이지만, 현지 직원 2500명 가운데 외지를 방문한 300여명과 우한에 갇혀 있는 120여명이 아직 격리 상태다. 한 대기업 현지 임원은 "원래 팀장 밑에 직원이 5~6명 있었는데, 지금은 1~2명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말했다.

    현지 주재원들은 "이런 상황에 떠나면 배신자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고 했다. 베이징 인근에 있는 한 대기업 주재원 최모(45)씨는 "반대로 한국에 이런 일이 일어나서 외자 기업 주재원, 경영진이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누가 그 회사에서 물건을 사고 일하려 하겠는가"라며 "위기지만 더 열심히 일하는 것 이외에 답이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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