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분석업체, 제약산업 구원투수로

입력 2020.02.10 03:08

美 23앤드미, 신약 후보물질 수출… 유전자 정보 활용해 성공 확률↑
임상시험 대상자 모집도 빨라져, 한국도 데이터3법 통과로 길 열려

미국의 바이오기업 23앤드미는 지난달 스페인의 제약사 알미랄에 루푸스 같은 자가면역질환에 효능이 있는 신약 후보 물질을 이전하는 계약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23앤드미는 소비자 직접 의뢰(DTC) 유전자 분석업체로 소비자가 플라스틱 용기에 타액을 넣어 보내면 다양한 질병 관련 유전자를 검사해준다. 제약사가 아닌 유전자 분석업체가 직접 신약 후보 물질을 개발해 제약사에 기술 수출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신약 개발 속도를 높여줄 유전자 분석 업체에 주목하고 있다. 사진은 유전자 분석 키트를 사용하는 모습.
글로벌 제약사들이 신약 개발 속도를 높여줄 유전자 분석 업체에 주목하고 있다. 사진은 유전자 분석 키트를 사용하는 모습. /블룸버그
유전자 분석 업체가 제약산업의 위기를 타개할 구원 투수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제약업계는 연구개발(R&D) 투자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새로 허가받는 약이 줄어드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기존 연구 방법이 한계에 봉착한 데다 과학 발전으로 그나마 개발된 약도 금방 부작용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소비자의 상세한 건강 정보와 연계된 대규모 유전자 분석 데이터가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일 뿐 아니라 부작용 없는 맞춤형 치료제까지 가능하게 해줄 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신약 성공 가능성 2배로 높여

제약사들이 활용 중인 유전자 분석 데이터베이스 그래프

23앤드미는 지금까지 1000만개 이상의 유전자 분석 키트를 판매했다. 고객 중 80% 이상은 자신의 유전자 정보를 질병 치료제 개발을 위한 연구에 활용해도 좋다고 승낙했다. 회사는 이를 근거로 제약업체들과 함께 신약 개발을 하고 있다. 23앤드미는 2018년 영국 제약사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으로부터 3억달러를 투자받아 4년 동안 공동 연구를 하기로 계약했다. 지금까지 신약 후보 물질 6개를 공동 발굴했다. 23앤드미는 2015년에는 자체 신약 연구 조직도 출범시켰다. 이번에 기술 이전한 신약 후보 물질은 이 연구 조직에서 나왔다.

미국 암젠은 아이슬란드 국민 전체의 유전자 분석 프로젝트를 진행한 디코드 지네틱스를 인수했다. 영국 정부 주도의 유전자 분석 프로젝트인 '바이오뱅크'는 애브비·화이자 등 글로벌 제약사 9곳과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 핀란드인 유전자 분석 프로젝트인 '핀젠'도 같은 규모로 글로벌 제약사들과 협력하고 있다. 23앤드미는 GSK 외에 미국 화이자와 스위스 로슈의 자회사 제넨텍과도 함께 연구 중이다.

유전자 분석 업체는 두 가지 방향으로 신약 개발 속도를 높일 수 있다. 먼저 신약 후보 물질을 찾는 과정이 훨씬 빨라진다. 23앤드미 고객은 분석 키트에 침을 넣어 보내면서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상세한 설문조사에도 답을 한다. 회사는 덕분에 기초 연구를 거치지 않고 질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통된 유전자 변이를 추려내 그에 맞는 신약을 바로 찾을 수 있다. GSK는 유전자 분석 업체와 손을 잡으면 신약 성공 가능성이 두 배로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또 임상시험 비용과 시간이 줄어든다. 예를 들어 GSK가 연구 중인 파킨슨병 유발 유전자 돌연변이는 1000명당 1명꼴로 발생한다. 이들을 대상으로 치료제를 임상시험하려면 전 세계에서 몇 년씩 환자를 찾아야 한다. 하지만 23앤드미는 고객 중에 해당 유전자 돌연변이를 가진 사람 7500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GSK가 치료물질을 개발해 임상시험을 시작하면 바로 환자 모집이 가능한 것이다. 23앤드미는 지난해부터 제약사들에 임상시험 환자를 모아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국내 업체도 신약 개발 진출

국내에서도 마크로젠, 테라젠이텍스 등의 DTC 유전자 분석 업체들이 병원, 제약사들과 손잡고 신약 개발에 뛰어들었다. 최근 데이터 3법이 통과되면서 소비자가 의뢰한 유전자 분석 정보나 병원의 유전자 분석 정보를 이용해 신약 개발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앞서 DTC 유전자 검사 항목이 12개에서 56개로 대폭 증가한 것도 도움을 줬다.

물론 국내 업체들은 아직 해외 업체만큼 대규모의 유전자 데이터를 확보하지는 못했다. 대신 자체 개발한 유전자 분석 기술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신약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 마크로젠과 분당서울대학교병원 공동연구팀은 폐암 환자에게 적합한 면역항암제를 알아내는 기술인 차세대 유전자 분석 기술을 개발했다. 테라젠이텍스도 자회사 메드팩토가 개발한 폐암 치료제가 적합한 환자를 유전자 분석으로 찾는 기술을 개발했다. 테라젠이텍스 관계자는 "데이터 3법 통과로 유전자 분석 데이터를 활용한 신약 개발의 길이 열린 만큼 정보가 축적되면 국내 업체들이 한국인 환자에게 특화된 신약 개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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