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땅 아세안, 변화의 현장을 가다- 베트남②

현지 진출 韓기업 어느새 9000개… 中 실패 거울 삼아야

현지 진출 韓기업 어느새 9000개… 中 실패 거울 삼아야

입력 2020.02.05 06:00

싣는 순서: 

① 하노이에서 한국인은 "다리 놓아주며 앞에 가는 사람"

② 현지 진출 韓기업 어느새 9000개...中 실패 거울 삼아야

③ “얕보고 들어올 생각 말라” 베트남 ‘빌 게이츠’가 말하는 한국인·한국기업

④ ‘韓 프리미엄‘ 떨어지기 전에 신사업 발굴해야… 美·中·日과 차별화 절실


최근 몇 년간 베트남 경제가 급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 고속 질주를 막 시작하던 중국을 떠올리는 경영자들이 많다. 베트남은 2014년 이후 지난해까지 매년 6%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하면서 글로벌 시장 ‘큰 손’들의 집중 관심을 받았다.

국내 기업과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국은 중국 투자에선 뒤쳐졌지만, 베트남에서만큼은 출발이 좋다. 한국은 최근 30년간 베트남에 가장 많이 투자한 나라다. 1988년부터 작년 말까지 투자 규모는 총 626억달러(약 73조원)로 이 기간 베트남에 대한 전체 외국인 투자 중 약 18%를 차지했다.

국내 기업의 베트남행 ‘러시(rush)’가 마치 근 몇년 안에 벌어진 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1988년 이후 한국 기업과 금융 회사들이 30년 넘게 베트남 정재계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덕분에 좋은 기회를 선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베트남 하노이의 한 오토바이 운전사가 새해를 뜻하는 화환을 운반하고 있다. /유진우 기자

베트남이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의 대(對)베트남 수출은 2009년 71억달러에서 2018년 486억달러로 약 10년 새 7배 가까이 늘었다. 일각에서는 중·장기적으로 베트남이 미국을 제치고 중국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양대 수출국으로 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국내 기업이 베트남을 보는 시각 역시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 과거엔 저렴한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는 단순 생산 기지나 수출 거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베트남은 기업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는 ‘결전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실감할 수 있는 분야가 금융업이다.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금융업’은 베트남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올해 신한·KEB하나·우리·농협 같은 국내 주요 은행 행장들은 일제히 글로벌 최대 격전지로 베트남을 꼽았다. 한국 기업·금융사들이 현지 기업을 인수·합병(M&A)하고 현지인을 대규모로 채용까지 해가며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에 집중한다.

신한은행은 1990년대 초부터 약 20년간 베트남에 공을 들였다. 1992년 국내 은행 중 처음으로 베트남 사무소를 열고 지금까지 기반을 다졌다. 전체 직원 가운데 97%를 현지인으로 채용했고, 30개 점포 중 17곳에서 베트남 사람이 지점장을 맡았다. 신한은 2018년 베트남에서만 순이익 966억원을 냈다. 신한금융그룹의 글로벌 수익 3215억원 가운데 약 30%에 달한다. 현재 베트남 내 외국계 은행 가운데 자산 1위(약 37억달러)를 지킬 정도로 입지가 굳건하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올해 베트남에서 사업 다각화를 추진 중”이라며 “대출뿐 아니라 외환파생, 자산관리(WM)부문 등 여러 방면에서 사업 기회를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아예 베트남 금융사를 대상으로 한 국내 금융사의 인수·합병 역시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4월 한화투자증권은 베트남 10대 증권사 중 한 곳인 HFT증권을 인수했다. 신한카드는 '푸르덴셜 베트남 파이낸스 컴퍼니(PVFC)'를 사들이고 현지 진출 준비를 하고 있다. 그 밖에 롯데카드·현대해상도 현지 금융 회사 지분 인수 형태로 베트남 진출을 선언했다.

금융권 관계자는 “베트남 경제가 성장하면서 이제 소비자들의 금융 생활이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 움직임”이라며 "베트남 정부가 현금 사용률을 낮추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점에서 선진 핀테크 기술을 활용해 (국내 금융사들이) 시장 점유율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인건비 절감이 핵심인 제조업 부문 국내 주요 기업들에 베트남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 축이다. 코트라 등에 따르면 베트남에는 작년 말 기준 약 9000개에 달하는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다. 올해 중 1만개 돌파가 확실시된다. 특히 최근 4년간 진출한 기업 수가 절반에 달할 정도로 최근 베트남에 대한 관심은 불붙고 있다.

하노이 시민들이 최대 명절 ‘뗏’을 맞아 문 앞에 붙일 걸개를 고르고 있다. /유진우 기자

한국 주요 기업 가운데 삼성전자는 베트남 터줏대감으로 불릴만 하다. 삼성전자와 삼성 계열사가 베트남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17년 기준 약 25%에 달한다. 베트남에서 매년 삼성전자가 생산하는 스마트폰 같은 모바일 제품 수만 1억7000만대다. 삼성전자는 2009년 베트남 북부 도시 박닌성에 공장을 세운 뒤, 현지에서 10만명이 넘는 근로자를 고용해가며 현지화에 공을 들였다.

효성도 지난 2007년 호찌민 인근 동나이성 연짝공단에 공장을 세운 뒤 글로벌 생산 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7년 이후 베트남에 누적 16억달러(약 1조8000억원)를 투자했다. 효성은 2008년부터 2019년까지 베트남에서 12년 연속 흑자를 기록 중이다.

SK그룹은 베트남 핵심 기업에 적극적으로 지분 투자를 하고 있다. 작년 베트남 민간 기업 2위인 마산(Masan)그룹 지주회사 지분 9.5%를 약 5300억원에 매입했고, 지난해도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1위 기업 빈(Vin)그룹에 약 1조2000억원 규모로 지분 투자를 단행했다. 빈그룹은 유통·건설사·리조트·종합병원에 이어 자동차·스마트폰 제조까지 진출한 거대 기업이다.

베트남 내 한국기업 주요 투자 유치 지역 /그래픽=이민경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은 작년 말 보고서에서 한국의 대베트남 수출 규모가 2020년부터는 대미(對美) 수출을 웃돌 수 있다는 예상을 내놨다. 국내 기업들의 현지 직접투자가 빠르게 증가하고, 2015년 12월 말 발효된 한·베트남 FTA(자유무역협정)가 교역이 늘어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

이와 관련해 정귀일 국제무역연구원 연구위원은 “베트남 수출 대부분이 중간재와 자본재에 쏠려 있고 소비재 비중은 아직 4%에 불과하다”면서 “높은 경제성장률, 소득 증가, 중산층 확대 등 향후 소비 시장으로서 잠재력이 큰 베트남에 소비재 수출을 늘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중요도가 부각될 수록 베트남 경제에 대해 낙관만 할 게 아니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베트남 투자 매력이 급증하면서 중국과 일본도 베트남 시장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해외 투자 시 금융권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기업 간 역할을 분담해 과당 경쟁을 방지하는 일본과 달리 우리 기업은 ‘각개전투’로 임하다 보니 제 살 깎아 먹기식 출혈 경쟁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문제다.

익명을 요구한 현지 한국 금융사 주재원은 조선비즈 인터뷰에서 “일본의 동남아 투자는 공식이 정해져 있다”며 “공항과 도로를 건설해 주고 혼다 오토바이를 가져와 팔다가 소득이 높아지면 도요타 차를 들여와 판다. 태국에서 했던 방식을 베트남, 미얀마에서 되풀이하는 데 실패할 수 없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1979년 베트남과 국경 분쟁(중∙월 전쟁) 이후 베트남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중국 기업과 투자자들도 엄청난 자본력을 앞세워 서서히 존재감을 높여가고 있다.

많은 한국 기업이 베트남으로 생산 거점을 옮기면 훨씬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고속 성장 중인 베트남의 노동 시장이 완전고용에 가까워 쓸 만한 인력을 채용하기 쉽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다. 성장 속도가 빠른 만큼 이직률도 높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고속 성장하는 중국 경제에 올라탔다가 결국 현지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수많은 국내 기업의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같이 나온다. 경제성장을 위해 외국 기업, 자본을 적극 유치했던 베트남은 이제 각종 규제 문턱을 조금씩 올리면서 외국인 의존도를 낮추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공단 진출 때도 대규모 투자만 가려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혁 한·아세안센터 사무총장은 조선비즈 인터뷰에서 “아세안 지역에서 한류 드라마와 K-팝의 인기는 여전히 뜨겁지만, 한국에 대한 신뢰가 일본만큼 높진 않다. 한국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아세안 시장에서 파이를 키워가며 함께 성장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아세안에 대한 경제 지배력을 높이려던 일본이 거센 저항에 방향을 바꿔 1977년 ‘아세안의 진정한 친구가 되겠다’는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한 것이 역내 국가에서 위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 것을 우리도 교훈 삼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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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에서 한국인은 "다리 놓아주며 앞에 가는 사람" 하노이(베트남)=유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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