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합장 자화자찬 詩碑가 아파트 한복판에… 입주민 부글부글

조선비즈
  • 고성민 기자
    입력 2020.01.23 10:10

    "꿈을 꾸었다. 아파트 조경의 신기원을 열겠다고. 실내에서 정원으로 생활문화를 바꾸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아파트 조경을 하겠다고. 그러다가 그 꿈은 어느결에 사명이 되었다."

    22일 서울 강동구 고덕그라시움 아파트에 조합장 자화자찬 시비가 설치돼 있다. /고성민 기자
    22일 찾은 서울 강동구 고덕그라시움 아파트 한복판엔 이같은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었다. 고덕그라시움은 고덕주공2단지를 재건축해 지어졌는데, 고덕주공2단지 재건축조합장 변모(66)씨가 고덕그라시움 입주에 맞춰 지난해 9월 설치한 것이다. 변씨는 한 문인협회 소속으로 시집을 출판한 적이 있다. 비석 하단에 스스로를 ‘시조시인’이라고 소개했다.

    이 비석은 약 2m 높이로 성인 남성 키보다 높다. 양 옆으론 보다 낮은 높이의 4개의 비석이 각각 2개씩 시비를 둘러싸듯 세워져 있다. 시비가 한껏 돋보이게끔 배치한 것이다. 비석은 조합의 사업비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시비에 새겨진 시의 제목은 ‘고덕 그라시움에 부쳐’. 자화자찬하는 문장으로 빼곡하다. ‘고통을 먹고 자라 사명이 된 나의 꿈은 드디어 현실이 되고 보람이 되었다’, ‘저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새 보금자리로 삼으며 내 죽은 뒤에도 한 백 년을 오손도손 살아가기를’, ‘삭발에 단식투쟁으로 숱한 규제 대응하며 몸 사리지 않고 투쟁하며 일했건만 근거 없는 유언비어와 지나친 욕심들이 진심과 진실을 몰아낼 때 그 아픔이 얼마이던가’ 등 내용이 적혔다.

    시비 앞에는 고덕그라시움 준공기(竣工記)라며 변씨가 설치한 또다른 비석도 있다. 이 비석에도 자화자찬이 이어진다. ‘운영비 조달이 어려웠던 시절 사재를 담보하면서까지 강한 인내와 굽히지 않는 의지로 좌절하지 않고 총무이사와 더불어 오늘의 역사를 이루었다’, ‘혼신의 노력을 다한 끝에 마침내 고통의 시간을 극복하고 위대한 명품주택 4932세대 건축역사를 이뤘음에 감개가 무량하다’는 등 글들이 적혔다.

    입주민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다. 이날 고덕그라시움 앞에서 만난 주민 A씨는 "다같이 사는 아파트에 조합장을 위인처럼 칭송하는 비석이 왜 있는지 어이가 없다"며 "설치 당시부터 ‘없애라’ ‘철거하라’ 등 내용이 적힌 포스트잇이 비석에 수차례 붙었는데, 포스트잇만 없어지고 비석은 철거되지 않았다"고 했다. 주민 B씨는 "일기장에나 쓸법한 글을 비석으로 세운 바람에 살기 좋은 아파트의 옥의 티가 됐다"며 "저 비석을 볼 때마다 부숴버리고 싶다"고 했다.

    변씨는 조선비즈와 통화에서 "헌 집을 새집으로 짓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난 뒤 뿌듯한 마음이 들어 만들었고, 시인이라 시적(詩的)으로 표현했다"며 "자화자찬이 아니라 정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왔다"고 했다. 그는 이어 "일반 분양자들 위주로 비석에 대해 불만이 많지만, 조합원들은 재건축하며 힘들었던 과정을 공유하고 있어서 불만이 별로 없다"며 "일부의 의견으로 비석을 없앨 생각은 전혀 없고, 비석을 세우는 게 불법도 아니다"고 했다. 변씨는 "조합 사업비(공사비)로 만들었는데, 몇천만원 정도 들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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