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에서 눈칫밥 먹던 한국기업들, 美 CES서 펄펄 난다

입력 2020.01.09 03:11

삼성·LG 부스에 연일 수만명 인파
애플·구글·소니 등도 앞다퉈 참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7일(현지 시각) 마이클 크라시오스 백악관 최고기술책임자(CTO)에게 "오늘부터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가 끝나는 날까지 모든 첨단 기술을 보고 오라"고 지시했다. 크라시오스 최고기술책임자는 미국의 AI(인공지능), 퀀텀컴퓨팅, 5G(5세대 이동통신), 자율주행 기술 정책 등을 총괄하는 핵심 인사다. 이란이 보복 차원에서 미군이 주둔한 이라크 공군기지에 미사일을 발사해 군사적 긴장감이 높아지는 상황에도 전 세계 IT 테크 흐름을 파악하라는 지시였다.

올해 CES는 160여 국 4500개 첨단 기업이 부스를 차려 혁신과 신(新)기술을 겨루는 전시장이지만, 주인공은 한국 기업 삼성·LG였다. 이날 오전 10시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에 마련된 삼성전자와 LG전자 전시장은 혁신 기술을 눈으로 직접 보고 체험하기 위해 몰려든 관람객으로,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삼성전자 부스엔 하루 동안 7만명의 관람객이 몰렸다. 현장에서 만난 IT 업계 관계자는 "우리 기업들은 한국에선 홀대받는 찬밥 신세이고 온갖 규제에 기를 펴지 못하지만, 해외에서는 전 세계가 주목하는 혁신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서 한국의 글로벌 위상을 높이고 있다"고 말했다.

LG전자는 전시관 입구 천장에 OLED 플렉시블(휘어지는) 디스플레이 200여장을 이어 붙인 영상 작품 '새로운 물결'을 설치했다(위 사진). 삼성전자는 웨어러블 보행 보조 로봇 '젬스'를 소개했다. 젬스를 착용하고 AR(증강현실) 글라스를 쓴 시연자가 가상 트레이너로부터 운동 지도를 받고 있다.
7일(현지 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막한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 2020'은 한국 기업이 주인공이었다. LG전자는 전시관 입구 천장에 OLED 플렉시블(휘어지는) 디스플레이 200여장을 이어 붙인 영상 작품 '새로운 물결'을 설치했다(위 사진). 삼성전자는 웨어러블 보행 보조 로봇 '젬스'를 소개했다. 젬스를 착용하고 AR(증강현실) 글라스를 쓴 시연자가 가상 트레이너로부터 운동 지도를 받고 있다. /연합뉴스·AFP 연합뉴스
7일(현지 시각) 세계 최대 IT 전시회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0'이 개막한 미국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4500여개 참가 기업 중 최대 규모(3368㎡)로 만들어진 삼성전자 전시장에는 오픈 시간(오전 10시) 이전이지만 입장을 위해 기다리는 긴 줄이 생겼다. 이들의 목에 걸린 명찰에는 애플·구글·소니·파나소닉·하이센스 등 글로벌 기업명이 적혀 있었다. 삼성전자가 올해 CES에서 어떤 놀라운 기술과 서비스를 내놓을지 한시라도 빨리 파악하기 위해 나온 글로벌 기업 임직원이었다. 이들은 전시장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삼성전자 제품을 만지고 체험하면서 샅샅이 훑어봤다. 부스 곳곳에선 "역시 삼성"이라는 말도 나왔다. LG전자가 플렉서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200여장을 연결해 전시장 입구에 만든 '새로운 물결(뉴 웨이브)' 조형물 앞에도 관람객 수백명이 긴 줄을 만들었다.

CES는 1967년 가전 전시회로 시작됐다. 지금은 IT 전시회를 넘어 AI(인공지능)·로봇·사물인터넷(IoT)·자율주행 기술은 물론 가전·모바일·자동차 등을 연결한 융합 기술이 더해졌고, 환경·프라이버시·고령화·건강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해 해답을 구하기 위한 혁신 아이디어의 장(場)이 됐다. 올해 CES에선 인공지능을 접목한 가전과 로봇, 스마트홈 등을 선보인 삼성과 현대차·SK·LG·두산 등 한국 기업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렸다.

◇"커피 좀 줄래" 하니 삼성 로봇이 척척

한국정보통신기술산업협회에 따르면 올해 CES에 참가한 한국 기업은 390여개다. 작년보다 31% 늘었다. 미국(1933개), 중국(1368개)에 이어 3위다. 일본(73개)의 5배가 넘는다. 지난해까지 CES를 장악했던 중국 기업은 미·중 무역 분쟁 여파와 '테크 자립'을 위해 자국 전시회에 몰두하며 관심이 떨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받는다. 국내에선 칭찬보다 비난에 익숙하지만 세계 어느 곳에서나 '샘성(Samsung)'과 '엘쥐(LG)'의 기술은 최고라는 평가를 받는다. 현장에서 만난 국내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국내에서 한국 기업을 바라보는 시선과 여기(CES)서 보는 시선은 같은 기업일까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삼성·LG는 올해 CES에서 중국과 일본 등의 경쟁사보다 최소 1년 이상 앞선 기술력을 선보였다. 7일 CES 삼성전자 전시장에서는 내부 식재료 현황을 자동으로 파악하고 기호에 맞는 맞춤형 레시피를 추천하는 냉장고, 사람을 따라다니며 인공지능으로 주변 가전기기에 명령하는 '볼리' 등이 공개됐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린 곳은 '삼성봇 셰프' 시연장이었다. 삼성봇 셰프는 각종 주방 도구를 사용해 채소를 볶고, 양념을 추가했다. 요리 시연자가 "커피 좀 줄래"라고 말하니, 커피 캡슐을 집어 커피 추출기에 넣었다.

LG전자는 작년 CES에서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롤러블(화면을 둘둘 마는) TV에 이어, 올해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롤러블 TV를 내놨다. 안면을 인식해 자동으로 문을 열어주는 현관부터 자동 조명 조절이 되는 침실까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으로 연결된 스마트홈도 선보였다.

◇SK·두산도 관심 집중

올해 처음 CES에 참가한 두산은 AI와 5G를 활용한 무인 공정 기술 '콘셉트 X'를 공개했고, 기존 드론보다 4배 이상 비행 시간을 늘린 수소연료전지 드론도 선보였다. 이 드론은 CES를 주관한 CTA(미국소비자기술협회)가 주는 최고 혁신상을 받았다.

SK는 작년보다 8배 넓어진 전시 부스를 만들어 5G 이동통신과 첨단소재·기술 기반 모빌리티 전략을 공개했다. SK이노베이션은 CES에서 전략회의도 열었다.

자동차 기업이 집결한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노스(North) 홀에는 현대차가 공개한 항공기 콘셉트 모델 'S-A1'을 보기 위해 전 세계 취재진과 자동차 업계 관계들이 모여들었다.

CES에는 각국 정부 인사들도 찾는다. 트럼프 대통령 지시를 받은 크라시오스 미 백악관 CTO는 폐막 날까지 CES를 참관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장관급으로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유일하게 참석했다. 성 장관은 7일 오후 삼성·LG·구글 등 부스를 관람했고, 8일 떠날 예정이다.

한국 기업들이 올해 CES에서 보여준 '퍼스트 무버'로서 저력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세계 주요국과 기업이 테크 패권 경쟁에 나섰지만 국내 현실은 암울한 상황이다. 주력 산업이 활력을 잃어가고, 신산업은 각종 규제로 발목이 잡혔다. IT 업계 관계자는 "세계 속에서 한국 기술력을 높인 기업들이야말로 진정한 애국자"라며 "중국이 무섭게 쫓아오는 상황에서 잘못된 정책으로 삐끗한다면 그동안 쌓아온 기술들이 한순간 무너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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