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조선업 불황으로 선박 설계 일감이 반 토막 났을 때,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장이 호황일 땐 밀린 주문을 처리하다가 한 해가 가버리는데, 불황 때는 연구·개발(R&D)을 할 여유가 생겼으니 말입니다."
지난 19일 서울 강남구 한국해사기술 본사에서 만난 신홍섭 대표는 '요즘 시장 상황이 많이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올해로 창업 50주년을 맞은 이 회사는 선박 설계를 주요 사업으로 삼고 있는 국내 첫 민간 조선 기술 용역업체다. 국내 유일한 쇄빙선 '아라온'호를 비롯해 심해 탐사선, 핵폐기물 운반선 등 특수 선박 2000여종의 설계에 참여했다.
26일 중소벤처기업부는 이 회사를 올해의 '명문장수기업'으로 선정했다. 명문장수기업은 정부가 한 업종에서 45년 이상 사업을 유지하며 성과를 낸 기업에 부여하는 인증 제도다.
◇어려울 때 '싱크탱크' 만들어
지난 19일 오전 방문한 한국해사기술 사무실 1층에서는 커다란 조타기가 눈길을 끌었다. 사무실 벽면 곳곳에는 이 업체가 설계한 선박이 항해하는 사진들이 가득했다. 신 대표는 배의 내부 구조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설계도를 펼쳐들고 "전 세계에서 우리처럼 다양한 선박을 두루 설계해본 업체가 드물다"고 했다. 선박 설계를 하는 용역업체는 대부분 완성된 설계도를 팔아 대량생산하는 사업에 주력하는데, 이 회사는 까다로운 선주들의 개별 요구에 맞춰 맞춤형 설계도를 만들어 낸다. 회사 측은 "덕분에 해외에서 의뢰가 여전히 많고, 매출의 80%가 해외에서 나온다"고 밝혔다.
한국해사기술은 국내 유일하게 사내에 R&D 조직이 있는 선박 설계 업체다. 조직의 이름은 '싱크탱크본부'. 현재 총 10명이 소속돼 있는데, 현업과 무관하게 국내외에서 발주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선박을 미리 설계해보는 게 주 업무다. 회사는 지난 2017년 본부를 신설했다. 당시 회사는 창업 48년 만에 업계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처음으로 적자 전환한 상태였다.
초반에는 '경력에 도움도 안 되고, 직접적인 매출도 이뤄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연구조직으로 발령나길 원하는 사람도 없었다. 회사는 특진과 함께 연봉을 10% 올려주겠다는 공약을 내걸고 겨우 당시 6명 규모의 싱크탱크 본부를 세울 수 있었다.
연봉을 높여가며 회사가 이 조직에 요구한 것은 '앞으로 들어올 수 있는 주문을 예측하고, 미리 설계를 해보라'는 것이다. 예컨대 고유황(硫黃) 디젤을 연료로 사용하던 기존 설계 선박들을 친환경 소재인 수소나 배터리 기반 선박으로 바꾸는 식이다. 신 대표는 "선박에도 친환경 규제가 늘어나면서 이와 관련된 주문이 쏟아질 것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2년 반 만에 성과
성과는 싱크탱크 조직이 만들어진 지 2년 반 만인 올 하반기부터 나타났다. 신 대표는 "올해 나라장터에서 10억원 규모의 선박 설계 입찰이 3개 진행됐는데, 모두 우리가 낙찰받았다"며 "여러 조건을 달고 선제적으로 설계를 해본 업체가 우리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기술점수를 월등하게 높게 받은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이 업체의 올해 매출 예상액은 지난해(59억원) 대비 20% 늘어난 약 70억원이다. 특허 수도 늘어났다. 2016년 0건이었던 특허출원 수는 2017년 6건에 이어 지난해 13건으로 늘어났다.
최근 정부가 관공서 선박 수백 척을 LNG(액화천연가스) 선박으로 바꾼다고 발표한 것도 호재다. 신 대표는 "기존 배의 연료를 바꾸려면 설계부터 모두 바꿔야 하는데, 우리처럼 연구 조직이 LNG 선박 설계를 숱하게 해본 업체에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라고 했다. 그는 "지난 50년을 조선업의 성장과 함께 커왔다면, 앞으로의 50년은 혁신 기술로 시장을 이끄는 역할을 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