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전경련 컨퍼런스센터 토파즈룸. 기업의 주총 담당자 등 재계 관계자 70여 명이 가득 들어찼다. 애초 준비한 50석이 모자라 간이 의자 20개를 추가로 부랴부랴 마련했다. 1시간 40분 동안 이어진 세미나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는 사람도 없었다. 질의응답 시간에 한 상장사 관계자가 "지금도 국민연금에 휘둘리는데 (국민연금의 경영 개입을 확대하는) 시행령이 개정되면 문제가 심각하다. 어찌해야 하느냐"며 우려 섞인 질문을 했다.

◇'시행령 공포'에 떠는 경영계

이 행사는 경제 단체 5곳이 문재인 정부의 상법·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에 대해 반대하기 위해 마련한 공동 세미나였다. 주제 발표자인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는 "정부의 상법·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은 삼권분립의 헌법 정신에 어긋나고 국가 법체계를 뒤흔드는 발상"이라고 했다.

이날 세미나를 주최한 단체들은 한국경영자총협회,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한국중견기업연합회,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코스닥협회 등 5곳이다. 현 정부 들어 전경련과 거리를 둬온 경총도 이번엔 전경련 산하 한경연과 공동 보조에 나설 만큼 경영계의 위기감은 컸다.

법무부의 상법 시행령 개정안은 이사나 감사 후보자의 경우, 주주들에게 사전에 체납·범죄 사실을 공개하도록 해 '인격권을 침해하는 과도한 규제'란 비판이 나온다. 최성현 한국상장회사협의회 정책본부장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침해될 우려가 있는 규제로서 해외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했다.

가뜩이나 교수, 전직 관료가 많은 우리 기업들의 사외이사진에 더 많은 '전관'이 꿰차고 들어갈 가능성도 높다. CEO스코어에 따르면, 올 1분기 30대 그룹 계열 190개사 사외이사 656명 중 39.3%(258명)가 관료 출신이었다. 정부의 상법 시행령 개정 취지인 '경영 전문성을 강화해 오너들을 견제한다'는 취지는 무색해지고, 관치만 강화될 거란 우려도 높다.

◇'연금사회주의' 우려 높아

'국민연금이 각종 사유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나 최태원 SK 회장 등 주요 그룹 오너들에게 경영에서 손 떼라고 요구할 수 있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은 정부가 민간기업의 경영권을 흔드는 '칼'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단순 투자 명목으로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관투자자도 임직원의 위법행위에 대해 해임청구권 행사, 지배구조 개선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추진 중이다.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은 국민연금의 지나친 경영 간섭으로, 기업들이 정부의 입김에 휘둘릴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금융위원회가 내년부터 시행할 예정인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안은 단순 투자 명목으로 지분 5% 이상을 보유한 기관투자자도 임직원의 위법행위에 대해 해임청구권 행사, 지배구조 개선 정관 변경 등을 요구할 수 있도록 했다.

회사에 해를 끼친 경영자에 대해 주주가 해임을 요구하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이 정부 영향력에 좌우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주요국 연기금 중 유일하게 현직 장관이 기금운용위원회의 장을 맡고 있는 등 위원 20명 중 6명이 정부 측 위원이다. 국민의 노후 자산을 불려야 하는 국민연금 본연의 임무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김동욱 경총 사회정책본부장은 "국민연금은 재무적 투자자로서 수익성을 높이는 데 주력해야 한다"며 "기업 경영 개입을 줄이는 동시에 기금 운용의 독립성과 전문성 강화를 추진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했다.

◇규제 남발로 일자리 해외로 내몰 것

경영계와 법조계에선 시행령 개정을 통한 기업 규제 강화에 대해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한다. 최준선 교수는 "상위법인 자본시장법의 위임 범위를 위반해 하위법인 시행령이 오히려 더 강하게 경영권을 흔든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공정경제 성과를 내기 위해 시행령 개정을 통한 규제를 남발하면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 기업들의 경쟁력이 더 약화될 것이란 우려도 높다. 유환익 한경연 혁신성장실장은 "불필요한 규제 남발로 기업들이 투자와 고용에 쓸 자금을 경영권 방어에 낭비하고 있다"며 "기업의 투자 의지를 꺾어, 일자리를 해외에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