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다, 도시 3.0] ⑤런던도심 망치질 25년 노하우 "사람이 먼저다"

입력 2019.11.22 06:00

[조선비즈 창간 10주년 기획]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다시 짓는 재개발·재건축과는 결이 다른 개념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현대인이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요소들을 갖추되, 지속가능한 미래까지 고려해야 하는 일종의 재창조 과정이다. 지구촌 곳곳의 거대 도시들은 이미 수십년에 걸쳐 이 숙제를 해왔다. 이제 한국도 이 물결 앞에 마주 섰다. 2020년 창간 10주년을 맞는 조선비즈가 이른바 도시재생의 모범생들을 직접 살펴봤다. 앞서간 이들의 발자국을 참고하면, 쇠락한 도시에 더 활기찬 숨결을 불어넣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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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시대 산업시설들이 밀집한 런던 킹스크로스역 주변 도시재생 사업에는 운하 옆 창고시설인 생선·석탄빌딩도 포함됐다. /런던시
성숙한 도시는 잘 짜여진 옷감
함부로 손대면 생태계 무너져
최우선은 경관이나 미학 아닌 ‘삶’

"인구가 늘면 병원이나 상점도 늘어야 하는데 개발을 막은 상태에서는 그러기가 어렵죠. 결국 낙후한 지역을 재생해 써야 하는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건축미가 아닌 거주민을 최우선에 둬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달 28일 찾은 런던대(UCL) 바틀렛건축대학(The Bartlett School of Architecture) 건축학부의 한 연구실. 유스턴(Euston)역 근처에 있는 이 곳에서 만난 피터 비숍(Bishop) 도시계획학과 교수는 "성장하는 도시에 주택이나 생활편의시설 등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면 도시 문제가 생긴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날 본 유스턴역은 공사장용 가림막에 둘러싸여 있었다. 유스턴역은 킹스크로스·채링크로스·빅토리아역 등과 함께 런던의 철도 거점으로 꼽히는 곳이다. 사실 유스턴역 뿐 아니라 런던의 주요 기차역과 지하철역 상당수는 공사 중이었다. 주말이면 철로 보수 사업 때문에 폐쇄하는 역을 안내하는 종이가 지하철역 입구에 나붙는다.

피터 비숍 UCL 바틀렛건축대학 도시계획학과 교수. /유한빛 기자
비숍 교수는 먼저 "현재 런던 곳곳에서 진행되는 도시재생 사업들은 1960~1980년대 개발된 것들을 현 시대에 맞게 개선하는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어 "교통난과 만성 주거 부족 같은 문제들은 런던시가 생활의 기반이 되는 사회간접자본(SOC)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고 했다.

비숍 교수는 지난 2012년 대학에 자리잡기 전까지 25년 동안 런던시의 도시계획정책을 담당했다. 런던개발청(LDA) 수석부청장을 지내며 시티오브런던특별자치구와 함께 런던의 양대 금융중심지로 발전한 카나리워프(Canary Wharf) 재개발사업, 캠든(Camden)자치구 개발사업, 킹스크로스역 중심부 개발 계획 등 여러 굵직한 도시재생·개발사업에 참여했다. 런던시 총괄건축가직에 해당하는 ‘런던을 위한 디자인’팀 총괄을 맡기도 했다.

비숍 교수는 런던을 예로 들며 도시가 외곽으로 확장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고 했다. 일차적으로 도심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는 것. 비숍 교수는 "런던의 경우에는 (인구, 면적 등) 도시의 성장과 관련해 아주 분명한 제한선을 두고 있다"면서 "그린벨트(개발제한구역)로 도심 확장을 억제하고, 이미 조성된 도심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기조를 유지하는 중"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런던은 도심 개발이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전체 면적의 65% 정도가 문화유산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개발할 여지가 많지 않기 때문. 고쳐 쓸 수 있는 공간을 고쳐 써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비숍 교수는 이 같은 물리적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런던시가 제도적인 접근법도 병행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런던 전역이 주차공간 부족 문제로 시달리기 때문에 도심에 주택이나 상업용 건물을 새로 지을 계획인 사업자는 대중교통을 개선하는데 일정 부분 기여해야 한다"면서 "시민은 자동차를 소유하기 위해 세금과 주차비 등 상당한 비용을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킹스크로스역 주변 운하와 철도를 이용한 석탄 운송·보관 창고로 사용된 콜 드롭스 야드의 1850년대 정경(맨 위)과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 중인 2000년대 모습(가운데), 2018년 완공된 현재 모습. /런던시
그는 이어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할 때 최우선으로 고려할 기준은 ‘도시 경관’이나 ‘건축적인 미학’이 아닌 ‘지역민의 삶’이라고 강조했다. 도시재생은 대개 성숙 단계에 들어선 대도시들의 과제인만큼, 지역 경제구조를 배제하고 사업을 추진해선 안된다는 의견이다.

비숍 교수는 "성숙한 도시는 이미 다 짜여진 옷감 같은 상태다. 주민공동체와 지역경제가 이미 촘촘히 얽혀있다"며 "도시재생 과정에서 이런 지역의 생태계가 무너지기 쉽기 때문에 어렵고 복잡한 과제인 것"이라고 했다.

"런던의 경우에는 1980년대에 도시재생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원주민들이 런던 도심에서 밀려나면서 지역 자영업 기반이 무너졌고, 실업 문제가 대두됐어요. 두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선 도시재생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또 충분한 시간을 들여 지역의 특성을 조사하고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숍 교수는 "낙후된 지역을 개선하고, 그 지역에 살던 주민들의 삶을 더 좋은 쪽으로 바꿔야 성공한 도시재생 사업"이라며 "해당 사업이 가져올 사회·경제적인 여파를 사전에 고려하고, 충분한 계획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색 건축물 같은 경관을 개선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면 안 된다는 얘기다.

그는 또 최근 들어 전 세계적으로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도시재생’이 중요해지는 기류가 눈에 띈다고 덧붙였다. 비숍 교수는 "도시관리정책 뿐만 아니라 도시재생 사업도 탄소배출량을 줄이거나 에너지효율성을 높이는 등 도덕적인 책임감을 갖고 진행해야 하는 시대"라고 강조했다.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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