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외치던 선진국들, 다시 원전 건설 나서… 바보야, 문제는 원전이 아니라 온실가스야

조선일보
  • 최현묵 기자
    입력 2019.10.22 03:46

    [Close-up] 한국만 거꾸로 가는 원전 정책

    - 탈핵운동 본거지 두 나라의 변화
    프랑스 신규 원전 6기 건설추진, 영국도 2030년까지 12기 계획

    - 원전 공포보다 온난화가 더 심각
    프랑스·영국 정부 2050년까지 온실가스 총배출량 '제로' 선언
    값싸고 깨끗한 원전 포기하면 온실가스 줄일 뾰족한 수 없어… 현실적인 대안 원전 다시 추진

    원전 비중을 대거 축소하겠다던 프랑스 정부가 신규 원전 6기 건설을 검토 중인 것으로 밝혀졌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선진국을 휩쓸던 '원전 축소' 바람이 '온실가스 감축'이란 전 세계적 환경 문제와 에너지 경쟁력 확보라는 절박한 과제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선진국뿐 아니라 전력 수요 급증에 값싸고 청정한 에너지원을 원하는 개도국들도 원전 건설에 적극적이다. 전문가들은 "후쿠시마 사고 직후엔 원전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했지만, 지금은 온실가스가 가져올 지구온난화의 공포가 더 크게 각인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 국가 중 독일·이탈리아·스위스·벨기에·스웨덴·오스트리아 등은 탈(脫)원전 정책을 고수하고 있지만, 후쿠시마 사고 직후 거세게 불었던 탈원전 바람이 세계적으로 잦아드는 추세라는 것이다.

    선진국들, 원전 사고 공포보다 온실가스가 더 위험

    프랑스 르몽드는 지난 14일(현지 시각) "엘리자베스 본 프랑스 환경장관과 브뤼노 르메르 재무장관이 EDF(프랑스전력공사) CEO(최고경영자)에게 '15년 내에 6기의 신규 원전을 건설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하라'는 공동 명의 서한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프랑스 정부가 공기업인 EDF에 사실상 원전 건설 재개를 지시한 것이다. 보도 직후 프랑스 재무부 관계자는 서한을 보낸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원전 건설이 최종 결정된 건 아니다"라고 했다.

    동틀 무렵 모젤 강변에서 바라본 프랑스 카테농 원전 모습. 프랑스에서 셋째,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원전 단지다.
    동틀 무렵 모젤 강변에서 바라본 프랑스 카테농 원전 모습. 프랑스에서 셋째,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원전 단지다. /게티이미지코리아
    하지만 EDF는 원전 건설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 회사의 장 베르나르 레비 CEO는 17일 르몽드 인터뷰에서 "프랑스가 신규 원전 건설을 준비하고 있는 건 분명한 사실"이라며 "5년 전 내가 EDF CEO를 맡을 때 주어진 사명도 그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는 세계적인 원전 강국이다. 전체 전력 공급의 75%를 원전에 의존하고 있어서 원전 비중이 세계 1위다. 하지만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에 대한 공포가 확산되면서 2015년 "원전 비중을 2025년까지 50%로 줄이겠다"고 발표했었다. 이후 원전 비중 축소 기한을 10년 후인 2035년으로 연기하긴 했으나 이 같은 기조는 유지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가 원전 건설 재개를 추진하는 이유 중 하나는 온실가스를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미 MIT 테크놀로지 리뷰는 지난 16일 "프랑스 정부가 지난 6월 '2050년까지 탄소 중립(탄소 순배출량 제로)을 이루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다"며 "탄소 배출을 줄이면서도 경제에 타격을 주는 걸 최소화해야 하는 프랑스 정부로선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원전을 잃기 싫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후쿠시마 사고 후 원전 비중을 축소하겠다던 프랑스 정부는 지난주 전력 공기업인 EDF에 신규 원전 6기 건설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은 EDF가 프랑스 북서부 플라망빌에 건설 중인 최신형(3세대) EPR 모델의 원전.
    후쿠시마 사고 후 원전 비중을 축소하겠다던 프랑스 정부는 지난주 전력 공기업인 EDF에 신규 원전 6기 건설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은 EDF가 프랑스 북서부 플라망빌에 건설 중인 최신형(3세대) EPR 모델의 원전. /블룸버그
    프랑스 정부가 건설을 지시한 원전 모델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안전 설비가 강화된 EPR 모델이다. 한국형 원전(APR1400)과 함께 3세대 원전을 대표하는 모델로 프랑스 EDF·아레바와 독일 지멘스가 공동 개발한 유럽의 대표 수출 모델이다. EPR 모델은 작년에 중국 타이샨 1호기가 최초로 완공됐고, 현재 프랑스 북부 플라망빌과 핀란드에서 건설 중이다. 하지만 설계상의 문제점으로 인해 건설비 초과와 공기 지연 등 각종 문제점이 노출돼 왔다.

    유럽에서 원전 건설 재개에 나서는 건 프랑스뿐이 아니다. 20년 넘게 원전 건설을 중단했던 '원전 종주국' 영국도 2030년까지 12기의 원전을 새로 지을 계획이다. 원전 6기를 운영 중인 체코는 지난달 두코바니 신규 원전 건설 계획을 승인했다. 체코는 두코바니와 테멜린에 각각 1GW급 원전 1~2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핀란드 역시 EPR 모델 원전을 짓고 있다.

    영국·프랑스 등 '탈핵 운동' 본거지인 유럽 선진국들이 원전 건설 재개로 돌아서는 이유에는 '지구온난화' 해결이라는 문제가 내재돼 있다. 영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지난여름 '2050년까지 온실가스 총배출량을 '제로'로 만드는 '네트 제로(net zero)'를 이루겠다'고 선언했다. 자국(自國) 내에서 배출되는 온실가스 양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어쩔 수 없이 배출되는 양만큼은 탄소 포집 기술 등을 통해 수거해서 결과적으로 총량 배출을 '0'으로 만든다는 야심 찬 목표다. 이를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 원전에 기대게 된 것이다. 지난 5월 선진국 클럽인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산하 국제에너지기구(IEA)도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노후화된 원자력발전소를 폐기하면 전기료가 올라가고 온실가스 배출량이 늘어날 것"이라며 "노후 원전 폐기를 재고하라"고 권고했었다.

    호주 브라질도 원전 건설 검토

    세계 원전 시장 현황 그래프

    상업용 원전을 지은 적이 없는 청정국 호주도 원전 건설을 검토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이 없는 미래 청정 에너지원(源) 확보를 위해 의회 차원에서 '원전(原電)산업 발전' 검토위원회를 구성했다. 호주 의회는 원전 도입에 따른 경제적·환경적·안보 측면의 영향 등을 검토한 뒤 올해 말까지 결론을 낼 예정이다.

    선진국뿐 아니라 신흥국들도 원전 건설 논의가 활발하다. 브라질 정부는 2050년까지 6기의 신규 원전 건설을 검토 중이다. 현지 언론 리우타임스는 지난달 "브라질 광산에너지부가 '2050년까지 원전 6기를 건설하는 방안을 현재 작성 중인 '국가 에너지 계획'에 포함시켰다"고 보도했다.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원전 건설에 나서는 가운데 한국은 짓고 있던 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등 역주행하고 있다. 문제는 원전 대신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을 늘리면 온실가스 배출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실제 환경부는 지난 7일 "2017년 온실가스 배출량이 2016년보다 2.4% 늘어났다"고 발표했다. 한국은 2030년까지 발전 분야 온실가스를 5780만t 줄여야 하는데 오히려 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원전 건설 재개 검토는 한국 원전업계에 결정적 타격을 줄 수 있다.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자유 진영에선 한국의 APR1400 모델이 최고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프랑스가 EPR 모델을 대량으로 건설하면 장래 한국형 원전 수출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지금까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노출했던 EPR 모델일지라도 계속해서 짓다 보면 문제점을 고칠 수 있고, 대량 발주에 따른 원가 경쟁력도 높아지게 된다"며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고사 위기에 놓인 한국형 원전 수출이 갈수록 더 힘들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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