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차, 美에선 2조 쓰는데…국내는 규제에 막혀 투자 ‘제자리걸음’

조선비즈
  • 진상훈 기자
    입력 2019.09.24 17:09

    선진국 허용한 자율주행차·차량공유서비스, 한국선 규제에 막혀 지지부진
    문 대통령, 현대차의 미국 투자에 "한·미 동맹 발전시키는 계기 될 것" 말했지만,
    해외 정상 만날 때마다 "기업들 미국에 투자해 달라" 독려하는 트럼프와는 대조적

    현대차그룹이 2조4000억원을 투자해 미국에 자율주행 합작법인을 세우기로 했다. 자율주행 핵심기술을 확보하면서 외국기업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행보와도 발을 맞추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기 위해 과감한 베팅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국내 산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의 미국 합작법인 설립을 두고 규제 해소에 소극적인 정부와 정치권으로 인해 기업의 투자가 나라 밖에서만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며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많다.

    현대차그룹이 미국에서 진행 중인 자율주행차 연구에 투입된 수소전기차 넥쏘/현대차 제공
    현대차그룹은 최근 몇 년간 차량공유서비스와 자율주행차 개발 등 미래 신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택시업계 등의 반발과 해묵은 규제에 가로막혀 투자가 ‘제자리걸음’만 하는 상황이다.

    만약 정부와 정치권이 과감한 규제 철폐로 기업의 국내 투자를 확대하지 못할 경우 양질의 일자리가 해외에서만 쏟아지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산업계 안팎에서 늘고 있다.

    ◇ 현대차, 아시아 이어 美에도 거액 ‘베팅’…국내는 투자한 사업도 철수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은 23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골드만삭스 본사에서 케빈 클락 앱티브 최고경영자(CEO)와 함께 자율주행 합작법인 설립에 대한 본계약을 체결했다.

    합작법인에 현대차그룹은 현금 16억달러와 자동차 엔지니어링 서비스, 연구개발(R&D) 역량, 지적재산권 등 4억달러의 무형자산을 합쳐 총 20억달러를 투입한다. 한화로 2조4000억원에 이르는 돈으로 자동차를 연간 30만대 생산하는 공장 2곳을 지을 수 있는 규모다.

    합작법인의 본사는 앱티브의 자율주행 사업부가 있는 미국 보스턴에 위치하며 피츠버그와 산타모니카 등 미국 외 지역에서도 연구개발을 진행한다. 사실상 현대차그룹의 투자 중 대부분이 미국 안에서 이뤄지는 셈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수석부회장(왼쪽)과 케빈 클락 앱티브 CEO가 뉴욕 골드만삭스 본사에서 자율주행 S/W 개발을 전문으로 하는 합작법인 설립에 대한 본계약을 체결한 뒤 기념촬영하고 있다./현대차 제공
    현대차그룹은 정의선 부회장의 주도로 최근 몇 년간 해외에서 공격적인 신사업 투자를 진행해 오고 있다. 정 부회장은 여러 차례 "미래에는 차를 소유가 아닌 공유를 하게 될 것"이라며 차량공유서비스와 자율주행차 등을 그룹의 핵심 성장동력을 삼고 투자를 확대해 왔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동남아시아 최대 카헤일링(호출형 차량공유서비스) 기업인 그랩에 2억7500만달러를 투자한데 이어 올해 3월에는 인도의 1위 카헤일링업체 올라에도 3억달러를 투자했다. 미국의 모빌리티 플랫폼업체인 미고와 호주기업인 카넥스트도어에도 전략 투자를 단행했다.

    자율주행 분야에서는 지난해 미국 오로라와 기술 공동 개발에 나서기로 했으며 고성능 부품 확보를 위해 미국 메타웨이브와 이스라엘 옵시스 등에도 투자를 결정했다. 이번 앱티브와의 합작법인 설립에 거액을 쓴 것은 자율주행 기술 확보를 위한 ‘방점’을 찍었다는 의미가 있다.

    현대차그룹은 이 밖에 커넥티드카 부문에서의 경쟁력 확보를 위해 스위스 웨이레이, 미국 사운드 하운드 등에 투자하고 있으며 크로아티아 리막 등과 손잡고 고성능 전기차 개발에도 나서고 있다.

    현대차그룹의 주요 해외투자 내용/현대차 제공
    반면 국내에서의 신사업 투자 규모는 해외에서 이뤄지는 투자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다. 심지어 이해관계자들의 반발과 정부 규제, 정치권의 입김 등에 가로막혀 진행한 투자마저 철수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2017년 국내 카풀 서비스 스타트업인 럭시에 50억원을 투자해 카풀 시스템을 공동으로 개발하고 신사업을 추진하기로 했지만, 1년도 안돼 보유한 지분을 전량 카카오 모빌리티에 매각하고 철수했다. 택시업계가 현대차의 카풀서비스 진출에 강하게 반발하고 나선데다 정부도 중재에 소홀한 자세를 보이면서 결국 투자를 중단한 것이다.

    자율주행 부문 역시 국내에서는 규제로 인해 자유로운 연구개발이 어렵다. 국내 법규는 시험 과정에서의 각종 사고 예방 등을 위해 실외도로에서 자율주행차 테스트 허가를 내주는데 까다로운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 규제로 신사업 성장판 닫는 정부…文 대통령은 美 투자에 "잘했다"

    정부는 지난 7월이 돼서야 전국 7곳에 규제자유특구를 만들면서 2021년까지 세종시에서 자율주행셔틀 운행을 허가하겠다고 밝혔지만, 네덜란드 로테르담과 미국 샌프란시스코 등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자유로운 실외 도로 주행이 가능하다. 현대차그룹과 앱티브의 합작법인 역시 주요 연구거점은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 피츠버그와 캘리포니아, 싱가포르 등에 조성될 예정이다.

    차량공유서비스의 경우 우버와 리프트 등이 성업 중인 미국, 그랩이 주도하는 동남아시아 등과 달리 국내에서는 전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차량공유의 불모지였던 유럽마저도 최근 메르세데스-벤츠와 BMW가 합작해 카헤일링 서비스인 ‘프리나우’를 보급하는 등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정부가 택시업계 반발을 의식해 규제를 지속하고 있다.

    문제는 기업의 투자가 주로 해외에서 이뤄져 국내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 정부가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은 23일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현대차의 미국 합작법인 투자에 대해 "한·미 동맹을 더욱 든든하게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추켜세우기도 했다. 해외 정상을 만날 때마다 기업의 미국 투자를 독려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대조되는 모습이다.

    자동차 업계 관계자는 "현대차가 해외에서 활발한 투자를 하는 사이 국내 자동차 업계는 매년 되풀이되는 노사 갈등과 투자 감소로 오히려 경쟁력이 더욱 위축되고 있다"며 "정부가 보다 과감한 규제 철폐와 기업의 투자 활성화 노력에 나서지 않을 경우 제조업의 위기가 가속화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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