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회사와 합작해 산업용 기자재를 생산하는 국내 A중견기업은 요즘 일본 파트너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이다. 일본의 합작사는 2012년 국무총리실 산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이하 강제동원 피해 위원회)'가 발표한 강제징용 전범 기업 299개 중 한 곳이다.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신일철주금에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한 후, 법원에서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A사 관계자는 "일본 합작사가 배상 판결을 받으면, 우리 회사 투자 지분이 압류될 가능성이 크다"며 "투자와 기술 제휴 등 합작 관계를 끊고 나가면, 회사가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악화된 한·일(韓日) 간 정치·외교 관계가 양국 경제 교류에 악영향을 미치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한국 투자가 줄어들고, 양국 교역 규모도 위축되고 있다. 일본 기업 사이에선 "전범 기업으로 몰려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 중이다. 전문가들은 "정치·외교 갈등이 경제 문제로 전이되지 않도록 하는 정책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한국 투자만 줄어든 일본

최근 일본 기업들이 해외에서 인수·합병(M&A)과 생산기지 확대에 나서면서 일본의 해외직접투자(ODI)는 늘고 있다. 지난 1분기 일본의 해외직접투자 총액은 1016억달러(약 120조원)로 전년 같은 기간(379억달러)보다 세 배 가까이로 늘었다. 중국(107%)뿐 아니라, 미국·인도 등에서 모두 증가했다. 하지만 일본의 직접투자 대상에서 사실상 한국만 소외돼 있다. 지난 1분기 한국에 대한 직접 투자액은 6억3000만달러(약 7500억원)로 전년보다 오히려 6.6% 줄었다.

한·일 양국 간 교역도 움츠러들고 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 이후인 작년 11월부터 올해 5월까지 한국과 일본의 교역 규모는 462억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9.3% 줄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상호 산업혁신팀장은 "한국과 관계에서 최근 일본 기업들의 움직임은 다른 국가와는 다르다"며 "최근 악화된 한·일 외교 관계의 영향을 빼면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본 투자자들은 한국 주식시장에서도 발을 빼고 있다. 올 들어 일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총 910억원을 팔아 치웠다. 같은 기간 외국인들이 한국 증시에서 약 7조원을 순매수한 것과 대조된다.

日 기업 "전범으로 몰릴까 두렵다"

작년 10월 대법원의 일본 전범 기업 배상 판결 후, 한국 내 일본 기업의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일본 기업 관계자는 "요즘 한국에 있는 일본 기업인들은 신규 투자나 기술 제휴가 아니라 '전범 재판'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실제 한국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일본 기업도 있다. 일본 반도체 부품 업체인 페로텍홀딩스는 지난 2월 국내 기업의 기술을 빼갔다는 혐의로 기소됐다. 이 회사는 최근 자국 웹사이트를 통해 "한국에서 일부 사업을 철수하기로 했다. 한국 사법부의 독립성이 완전히 담보되지 않을 우려가 있다"고 밝혔다. 일본 기업과 제휴한 한국 기업들도 긴장하고 있다. 일본 기업과 합작한 국내 화학회사 관계자는 "전범 기업 관계사와 제휴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인터넷 등에 우리 기업을 비판하는 소리가 나온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 유환익 혁신성장실장은 "두 나라가 모두 실용주의에 입각해서 갈등을 조기에 봉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