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무한정 찍어내도 나라가 안망한다고? 진짜야?

조선일보
  • 방현철 기자
    입력 2019.06.12 03:08 | 수정 2019.06.14 10:28

    [Close-up] 골방 속 경제학 MMT에 "그럴듯한데" 세계가 들썩

    지난 3월 전 세계에 출시된 600쪽짜리 한 '거시(巨視)경제학' 교과서가 발간 2개월 만인 지난달 말 '완판'돼 학계에서 화제가 됐다. 저자들은 호주 뉴캐슬대의 윌리엄 미첼 교수, 미국 바드 칼리지의 랜들 레이 교수 등으로 주류 학계엔 명함도 못 내밀던 학자들이다. 그런데도 책이 관심을 끈 것은 최근 미국 경제학계, 금융업계 거물들이 너도나도 한마디씩 논평을 내놓는 '현대통화이론(Modern Monetary Theory·MMT)'을 본격적으로 다룬 첫 교과서였기 때문이다.

    돈, 무한정 찍어내도 나라가 안망한다고? 진짜야?
    /그래픽=김현국
    1990년대 초 탄생해 30년 가까이 소수 학자와 경제학 블로그 등 변방에서만 떠돌던 경제 이론이 올 들어 갑자기 미국·일본 등에서 주목받고 있다. MMT라 줄여 부르는 '현대통화이론'이 그 주인공이다. MMT는 한마디로 '독자적인 화폐를 가진 나라의 정부는 무한정 돈을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재정 적자를 불려도 국가 부도는커녕 아무 문제가 없다'로 요약된다. '재정을 마냥 풀면 물가와 금리가 급등하고 국가 신용등급이 떨어져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기존 경제학 통념과 180도 다른 얘기다. MMT는 '공짜 점심은 없다'는 주류 경제학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이단'적인 이론이다. 주류는 정부가 돈을 마구 풀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정부 돈이라도 풀어 일자리를 만들고 성장해야 한다'는 정치 담론이 미국에서 점차 강해지면서 MMT가 돌연 힘을 받고 있는 것이다.

    'AOC 효과'와 '트럼프 효과'

    MMT는 1990년대 초 헤지펀드 매니저 워런 모슬러, 윌리엄 미첼 뉴캐슬대 교수 등이 처음 거론하기 시작했다. 그 후 모슬러가 미국 미주리대(캔자스시티)와 바드 칼리지 등을 후원하면서 이곳에서 MMT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까지 MMT학파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었고 학술지보단 인터넷 토론방 등에서 주로 모습을 드러냈다.

    '골방 속 경제학'에 불과했던 MMT를 논란의 무대로 끌어낸 사람은 미 민주당의 정치 샛별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29) 하원 의원이다. 그는 작년 11월 역대 최연소로 의회에 입성했으며 'AOC'란 약자로 불린다. 소셜미디어 팔로어가 430만명에 달한다. 미 정가 일각에선 정치인을 약자로 부르는 건 루스벨트 대통령(FDR), 케네디 대통령(JFK) 이후 처음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한다.

    주류 경제학과 현대통화이론의 비교
    그는 연초 전면적인 친환경에너지 개발로 일자리를 만들자는 '그린 뉴딜'이란 경제 비전을 발표했는데, 매년 소요 재원만 현재 연간 예산(4조달러)의 1.5배가 넘는 6조600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재원 조달 방안이 없다'는 비난에 그는 'MMT'를 제시했다. '그린 뉴딜'에 막대한 재정을 넣어도 나라가 파탄 날 걱정이 없다는 주장인 것이다.

    여기에 트럼프 진영도 MMT의 영향권에 있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의 감세로 재정 적자가 늘자, 현 정부 내에서 '재정 적자가 불어도 감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래리 커들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은 최근 "좋은 성장 정책은 재정 적자에 강박 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MMT가 그리는 세상은 주류 경제학과 완전히 달라

    주류 경제학계에선 MMT를 '말도 안 되는 이론'이라고 몰아붙인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 같은 민주당 성향의 확대 재정론자들도 MMT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서머스는 "정부가 돈을 무한정 찍어 낸다면 초(超)인플레이션이 올 것"이라며 "MMT를 채택하는 건 재앙으로 가는 방안"이라고 했다. 초인플레이션은 물가 상승률이 월 50%를 넘는 상황으로, 과거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때나 최근 짐바브웨 등에서 실제 발생했다. 금융업계에선 논란이다.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은 "재정 적자는 시장 금리를 상승시켜 유지 불가능한 수준까지 높일 수 있다. MMT는 쓰레기(garbage)다"라고 했다.

    주류 경제학에선 재정을 조달하려면 세금을 걷고 국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본다. 재정 적자가 불어 국채 발행이 늘면 시장에 채권 공급이 늘고 채권 가격은 하락(금리는 상승)하게 된다. 시장 금리가 급등하면 기업 활동이 어려워져 성장이 더뎌진다. 그래서 위기 때나 적자 재정을 감수하지 평소엔 균형 재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만 MMT가 그리는 세상은 주류 경제학과 완전히 다르다. 세금을 걷지 않고 국채를 발행하지 않아도, 정부는 무한정 돈을 찍어내 재정 지출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냥 중앙은행에서 돈을 가져다 국민에게 뿌릴 수 있단 것이다. 통화정책은 무용지물이어서 금리는 '제로(0)'가 되고, 시중 돈의 양은 정부가 세율을 높이거나 낮춰 조절해야 한다고 본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달러나 엔을 쓰는 기축통화국이라 해도 정부가 의회나 중앙은행 등의 견제를 받지 않고 마음대로 돈을 쓴다는 건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며 "MMT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이론"이라고 말했다.


    ["나라 빚 1000兆엔 일본을 봐… 국가부도 안나잖아"]

    현대통화이론(MMT) 학파는 실제 MMT가 작동한 사례로 일본을 들고 있다. MMT 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스테파니 켈턴 미 뉴욕주립대(스토니브룩) 교수는 최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일본은 막대한 재정 적자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고 재정 파탄에도 이르지 않았다"며 "일본은 MMT의 실증 사례로 미국이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은 재정 적자가 누적되면서 국가 채무 규모가 국내총생산(GDP)의 237%에 달한다. 그렇지만 당장 일본이 '국가 부도'를 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다. 켈턴 교수는 2016년 미 대선 때 버니 샌더스 캠프에서 조언을 했다.

    일본 내에서도 MMT 옹호론이 나온다. 경제평론가인 나카노 다케시는 최근 자민당 의원 10여 명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일본 정부 채무가 5000조엔이 돼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현재 일본 정부 채무인 1000조엔의 5배에 달하는 규모다. 그러나 일본 재무성은 지난달 17일 MMT에 대한 반박 자료를 의회에 제출하고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자료엔 국가 채무 확대에 대한 낙관론을 반박하고 재정 건전화를 강조하는 내용이 담겼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도 지난 3월 기자회견에서 "(MMT가) 모순되지 않게 체계화된 이론이라 할 수 없다"고 말했다.


    ☞MMT(Modern Monetary Theory·현대통화이론)

    통화량은 돈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류 경제학과 달리 정부가 화폐량을 조절할 수 있다는 이론. '독자적인 화폐를 가진 나라의 정부는 무한정 돈을 찍어 낼 수 있기 때문에 재정 적자를 불려도 국가 부도는커녕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 바로잡습니다

    ▲일부 지역에 배달된 12일 자 B2면 '돈, 무한정 찍어내도 나라가 안 망한다고?' 기사 소제목 중 'MTT'는 'MMT'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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