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활을 걸고 달라져야 한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

김광수 NH금융지주 회장이 작년 4월 말 취임 이후 직원들에게 한결같이 던지는 주문이다. 김 회장은 취임하는 날 직원들 앞에서 "농협금융이 보수적이고 관료화됐다는 비판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며 쓴소리부터 날렸다. 그는 NH금융이 신한·KB·하나·우리금융 등과 함께 5대 금융지주로 불리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NH금융은 다른 4대 금융지주와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이 필요하며, 그러려면 더욱 혁신적인 마인드로 무장해야 4차 산업 시대에 생존할 수 있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비운의 엘리트 금융 관료'에서 '금융회사 CEO'로 변신한 김광수 NH농협금융지주 회장이 서울 중구에 있는 본사에서 본지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 회장은 디지털 혁신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면서 "5년 뒤까지 직원의 절반을 디지털 인재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김광수 회장은 30여 년간 정통 엘리트 금융 관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다. 저축은행 사태에 연루된 의혹으로 금융권을 4년 가까이 떠났던 김 회장이 자산 400조원 규모의 민간 금융회사 수장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 변화를 일으킬지 금융권이 주목했다.

김 회장이 제시한 키워드는 '디지털 물갈이'였다. 사람을 내보내는 물갈이가 아니라, 디지털 역량을 갖춘 사람들로 직원들을 탈바꿈시키는 방식이다. 김 회장은 "디지털 혁신은 금융회사가 가야 할 방향이 아니라, 가지 않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는 길이 됐다"면서 "디지털은 그냥 도구일 뿐이지 사람이 우선 달라져야 한다"고 했다. "직원들이 '내가 어떻게 변해야 디지털 금융을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라는 것이다.

"5년 뒤 직원 절반을 디지털 인재로"

김광수 회장은 취임 후 지난 1년간 디지털 물갈이를 위해 고민한 방안들을 오는 7월 발표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약 5년 안에 금융 계열사 전 직원 약 1만2000명 중 절반가량을 디지털 관련 업무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인재들로 만들겠다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김광수 NH금융 회장이 경기 여주시의 한 농가를 방문해 복숭아 열매에 봉지를 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

우선 신입 사원 교육 제도부터 바꾼다. 앞으로 신입 사원은 입사 직후 한 달 내내 디지털 관련 교육만 시키기로 했다. 김 회장은 "신입 사원을 대상으로 하루 8시간씩 1개월간 교육 프로그램을 정밀하게 짜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졸업할 때까지 배우는 전공필수를 이수한 수준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한 해 선발하는 신입 사원 수는 연평균 500~600명 정도인데, 이만큼의 디지털 역량을 갖춘 직원을 매년 심겠다는 것이다. 동시에 2020년까지 그룹 내에 빅데이터 분석 전문가인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도 1000명 키운다. 서울대 빅데이터연구원, 서울과학종합대학원 등과 협력해 직원들을 보내 재교육을 받게 하고 일부 채용도 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다른 재교육 받는 직원까지 합하면 약 5년쯤 뒤에는 전 직원의 절반 정도가 디지털 역량이 있는 인력이 될 것"이라며 "자연스럽게 전 직원이 디지털에 대해 고민하는 분위기가 생기도록 동기 부여하겠다"고 말했다.

◇"실리보다는 재미가 화두인 시대 됐다"

김광수 회장이 생각하는 실험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게임 회사에 금융 상품 개발을 맡겨보는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었더니, 차량 공유 서비스 '우버' 얘기를 꺼냈다. 그는 "우버 이용자들이 스마트폰으로 맵을 보면서 목적지를 정해 차를 부르면, 차에 탄 다음 목적지를 말하지 않아도 되고 내릴 때 계산을 안 해도 앱이 알아서 돈을 내주는 이런 재미가 우버의 성공 요인이었다"면서 "아무리 경제적으로 이득이라고 말해도 앞으로는 재미없으면 이용하지 않는 세대가 됐다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런 점을 감안해 국내에서 카카오뱅크나 핀테크 기업들이 출시하는 재미있는 상품들을 눈여겨보고 있다. 최근에는 카카오뱅크의 '26주적금'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가입자가 1000원, 2000원, 3000원, 5000원, 1만원 중 하나를 정해 매주 그 금액만큼 저축액을 늘려 가입자의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상품이다.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인터넷전문은행 참여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김 회장은 "현재 정부에서 중(中)금리 대출을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인터넷은행 라이선스를 주고 있다고 본다"면서 "중금리는 충분히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인터넷은행까지 들어갈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농협답게… 농업 선진화와 동남아 투자

농협금융지주 회장으로서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도 김 회장의 목표 중 하나다. 단순히 농협에서 대출을 해주거나 정부 정책 자금을 공급하는 중개 역할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IT를 농업과 접목한 스마트팜이나 농업 선진화에 도전하는 청년들을 지원하고 발굴하는 것에 특히 집중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농협 같은 협동조합 금융회사인 프랑스의 '크레디 아그리콜'과 네덜란드의 '라보뱅크'를 롤모델로 지목했다. 김 회장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발맞춰 농식품 분야 유망 스타트업을 선제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자금을 적극 투자할 것"이라면서 "스마트팜이나 생산 관리 시스템 등 선진 농업 분야에서 성공 모델을 만들어서 다른 농업인들이 바로 현장에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세안 지역 공략도 이어간다. 현재 베트남의 농업 부문 국영은행 '아그리뱅크'에 지분 투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김 회장은 "아그리뱅크에 지분을 투자하게 되면 NH은행과 증권이 현지에 둔 회사와 함께 IB(기업금융) 부문을 확대할 계획"이라며 "일부 국내 은행은 베트남에서 현지 지점 등을 넓히면서 소매 영업을 하지만 우리는 일반 소비자보다는 현지 투자처를 발굴하거나 기업에 자금 공급하는 방향으로 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혹시 이책 읽어보셨나요? 독서광 김광수 회장의 리스트]

김광수 회장은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책 이야기를 빼놓지 않는 독서가다. "스트레스를 독서로 관리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김 회장이 회의 자리 등에서 자기가 읽은 책 내용을 언급하며 토론을 유도하는 바람에, 자연스럽게 NH금융 임원들 사이에서 독서 열풍이 불고 있다. 김 회장이 "시대 변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꼽은 '애독서'를 소개한다.

① 포노사피엔스

"포노 사피엔스는 '스마트폰을 몸의 일부처럼 여기는 신인류'라는 뜻이다. 불편해도 재미있는 것을 추구하는 시대 변화를 읽어야 디지털 금융도 가능하다"

② 90년대생이 온다

"조직에서는 신입 사원, 시장에서는 트렌드를 이끄는 주요 소비자인 90년대생이 사회의 주류가 되어가는데, 이들을 이해해야 우리도 성장할 수 있다"

③ 예정된 전쟁

"현재 미국과 중국의 무역 분쟁의 원인을 고민하고 앞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날지 생각할 기회를 준다"

[김광수 회장은 누구]

김광수 NH금융지주 회장은 금융권과 관가에서 '불운한 엘리트 관료'로 통한다. 광주일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행정고시 27회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30여 년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과장과 금융위원회 금융서비스국장, 금융정보분석원장 등 금융관료로서 요직을 두루 거쳤다. '호남 출신 재무 관료'의 대표 주자로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때 잇따라 청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11년 저축은행 사태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공직에서 물러나게 되는 고난을 겪었다. 당시 김 회장은 구속돼 약 10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2013년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 판결을 받았지만 복직 후 6개월 만에 사표를 내면서 관료로서의 삶을 마감했다. 그 후 법무법인 율촌에서 고문으로 지내다 작년 NH금융지주 회장이 되면서 금융권에 복귀한 것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금융위원장, 한국거래소 이사장, 금융감독원장 등 금융권 요직이 빌 때마다 김 회장 이름이 수차례 거론됐다. 김 회장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등 관료 선후배들이 "훌륭한 인재"라며 구명 활동에 적극 나섰다.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작년 4월 NH금융지주 회장이 되기까지 약 4년을 금융권 밖에 머물렀다.

금융권 관계자는 "NH금융지주 회장 한 번 지내는 것으로 스스로 충분히 명예 회복이 됐다고 보기 어렵지 않겠나"라면서 "문재인 정부 내에서 한 번쯤은 더 역할을 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