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관승의 리더의 여행가방] (40) 안네 프랑크와 괴벨스의 일기... "기록해야 역사가 된다"

조선비즈
  • 손관승·언론사 CEO출신 저술가
    입력 2019.05.10 05:00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우리는 일기를 잃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손으로 노트에 일상을 기록하던 버릇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에 밀려난 지 너무도 오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를 쓴 유대인 소녀를 기리는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하우스는 새삼 일기라는 장르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기의 여주인공 안네 프랑크./사진=안네 프랑크 하우스 제공
    안네 프랑크는 1929년 6월 12일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다. 만약 그녀가 아직도 생존해 있다면 올해 나이 90세의 할머니이다. ‘유관순 누나’가 그러하듯 안네는 영원한 소녀로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안네가 그의 가족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것은 다섯 살 때인 1934년이었다. 1년 전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당이 집권에 성공하면서 반유대주의 공포감이 감돌았기 때문이다. 두 외삼촌은 미국으로 망명했지만, 안네의 아빠 오토 프랑크씨는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잼을 가공하는 작은 업체의 사장이 된다

    암스테르담의 주요 운하가운데 하나인 프린센흐라흐트에 있는 안네 프랑크 하우스./사진=안네 프랑크 하우스 제공
    1942년 6월 12일, 이날은 안네가 만 13세 생일이 되던 날이다. 그녀는 생일선물로 받은 일기장에 저 유명한 안네의 일기를 쓰기 시작한다. 만 13세면 한국으로 하면 여자 중학교 1학년생 나이다.

    며칠 뒤 6월 20일 토요일에 쓴 "나는 왜 외톨이라고 느끼는 걸까?"라는 글이 눈에 뜨인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녀답게 공연히 울적한 기분이 들던 날, "종이는 인간보다 더 잘 참고 견딘다"는 옛말을 상기해내고는 글을 쓰기로 결심한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부모님과 열여섯 살인 언니가 있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서른 명쯤 알고 있다. 남자 친구도 많다. 모두들 어떻게 해서든 나의 관심을 끌려고 한다. 그게 잘 안되면 교실의 거울을 통해 몰래 나를 볼 정도니까.

    친척도 많고 상냥한 아주머니들도, 좋은 집도 있다. 그렇다.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진짜’ 친구를 제외하면 말이다. 내 친구들은 모두 그냥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하는 사이일 뿐이다."

    책장으로 위장한 비밀 은신처. 이곳에서 안네는 답답한 마음을 일기로 푼다./사진=안네 프랑크 하우스 제공
    그러면서 사춘기 소녀 안네는 ‘키티’(Kitty)라는 이름의 가상 친구를 만들어 매일 일기장에서 대화를 하기 시작한다. 어린 소녀는 정직하고 또 의젓하게 묻고 또 묻는다.

    흔히 글을 쓴다는 것은 스스로 사유를 하고 내면화 작업의 시작이라고 말하는데, 13살 감수성 풍부한 소녀의 성숙함이 엿보인다.

    비좁은 골방에 8명이나 함께 살아야 했던 갑갑한 상황에서 글쓰기는 정신적 탈출구 역할을 해주었다. 1944년 5월 12일 목요일의 일기에서 그녀는 미래의 꿈을 처음 밝힌다.

    "내 최대 희망은 저널리스트, 그리고 그 다음엔 저명한 작가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산더미처럼 쌓인 공부가 나의 동경(광기?)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될까? 내 머리 속에 아주 많은 테마가 들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어쨌든 전쟁이 끝나면 가장 먼저 <은신처>라는 제목으로 한 권의 책을 쓰고 싶다. 잘 써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기가 큰 도움이 되겠지."

    여기서 <은신처>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싶다고 말한 것은 1944년 봄 런던에서 방송되는 ‘라디오 오란여’라는 네덜란드 망명 정권의 전파를 통해 전쟁이 끝난 뒤 독일 점령하에서 고생했던 네덜란드 국민 수기 또는 편지를 모아서 공개할 예정이라는 발표를 들은 데 따른 것이다.

    이를 위해 안네는 그때까지 쓴 일기를 정리하여 미숙한 문장을 다시 고쳐 쓰고 부분적으로 삭제하거나 첨가하기도 했다.

    안네 프랑크 하우스에 보관중인 최초의 일기/사진= 안네프랑크 하우스 제공
    때문에 최초로 쓴 일기를 ‘a텍스트’, 그리고 고쳐 쓴 일기는 ‘b텍스트’라고 학자들은 구별한다. 훗날 아버지인 오토 프랑크가 자기 딸의 일기를 발견하고 공개를 결심한 뒤 자신과 관련된 부분을 빼고 편집하여 출간했기에 이는 ‘c텍스트’라 부른다.

    그녀는 1944년 8월 1일까지 매일 꼬박꼬박 자신의 일상을 써내려 갔지만, 8월 4일 은신 중이던 8명 모두 잡혀가게 된다. 누가 밀고했는지를 두고 많은 추론이 있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당시 암스테르담에는 약 8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80%가 나치에 의해 사라졌다. 안네는 언니와 함께 처음에는 아우슈비츠로 갔다가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옮겨져 장티푸스 후유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니정보]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 하우스

    안네의 일기는 회사의 여비서가 발견해 몰래 보관해오다 전쟁 후 아버지 오토 프랑크씨에게 전해주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안네 프랑크가 숨었던 방./사진=안네 프랑크 하우스 제공
    여기서 하나의 역설을 발견하게 된다. 안네 프랑크와 그녀의 유대인 가족들이 해외로 망명하고 또 죽음의 수용소로 내몬 나치정권의 주역 가운데 한명인 요제프 괴벨스 역시 방대한 양의 일기로 유명하고, 그가 꿈 꾸었던 미래의 직업 또한 기자와 작가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명은 유대인 탄압의 가해자에 섰고, 또 다른 한 명은 피해자가 되었지만 말이다.

    괴벨스는 27번째 생일 직전인 1923년 10월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1945년 5월 1일 마지막 순간까지 일기를 썼다. 그의 일기는 소련의 붉은 군대가 모스크바로 가져가 비밀리에 관리해오다 냉전이 무너지면서 서방 세계에 공개되었다.

    독일현대사 연구소가 발간한 괴벨스의 일기집은 두꺼운 책으로 무려 29권에 이르는 방대한 양이다. 특히 1933년부터 1945년 자살할 때까지 히틀러 치하에서 제국 선전부 장관으로 일했던 12년 동안의 기록은 나치의 내부에서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사료가 되었다.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 박사출신이며 기자와 작가 지망생이었다./사진=위키피디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고학력 지식인이고 글 솜씨도 있어서 몇 번이나 언론사의 문을 두드렸지만 취직에 실패한다.

    <방황하는 사람>이라든가 <고독한 나그네>같은 드라마와 <마하엘>같은 소설을 여러 편 썼고 유명출판사에 보내 출판을 의뢰했지만 역시 외면당했다. 좌절한 괴벨스는 비참한 자신의 처지를 일기장에 비장하게 써내려 갔다.
    "나는 제로다. 그러나 위대한 제로다."

    그는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일기에 적고 있다. 좌절한 지식인에게 일기는 참으로 훌륭한 치료제 역할을 했다고 후세의 전문가들을 분석한다. 처음에는 좌파에 가까웠던 괴벨스였지만 취업이 안되고 1925년 7월에 히틀러를 만나면서 점차 극우적 성향으로 변해간다. 자기를 인정해준 사나이를 만난 마음을 이렇게 일기장에 고백했다.

    "그는 37세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괴벨스에게 생일선물로 일기장을 주어 처음 일기를 쓰게 만들었던 사람은 엘제 얀케라는 여자인데, 그녀는 절반 유대인이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괴벨스는 그녀와 사귀다 결국 결실을 맺지 못하고 헤어진다.

    히틀러와 함께한 괴벨스 가족./사진=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고 1947년 마침내 소녀 안네 프랑크의 소망은 이뤄진다. ‘Het Achterhuis’라는 제목으로 그녀의 일기가 출판된 것. 네덜란드어로 ‘비밀 은신처’를 뜻한다. 그녀의 일기는 현재까지 전세계 7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으니 사후 초대형 베스트셀러의 작가가 되었다.

    반면 괴벨스 역시 악(惡)의 반면교사로서 유명한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가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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