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김모(36)씨는 12일 오후 서울 중구의 현대자동차 매장을 찾아 대형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 '팰리세이드'를 구입하려 했다. 판매 사원은 "지금 계약해도 최소 6개월은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올봄에 가족 캠핑을 가기 위해 사려고 했는데 여름 휴가철에도 받기 어렵다니…"라고 말했다.

팰리세이드의 인기가 고공 행진을 펼치는 가운데 사양별로 차이가 있지만 주문 후 차를 받는 데 평균 6~7개월에서 최대 10개월까지 걸리고 있다. 주문이 폭주해도 부품 수급 문제와 노조의 동의를 얻는 데 시간이 걸려 생산량을 늘릴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차는 소비자 이탈을 우려해 최근 노조와 긴급 증산(增産) 협의를 시작했다. 업계 관계자는 "요즘 같은 세상에 제품을 사겠다는 고객에게 6~7개월씩 기다리라는 회사는 현대차뿐일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노조와 증산 놓고 긴급 협의

12월 출시된 팰리세이드 인기는 폭발적이다. 지난달까지 누적 판매량(출고 완료)은 7811대다. 지난달에만 5093대가 팔렸다. 출시 이전에 비축해 둔 물량을 풀어 월평균 4000대인 공급 능력을 초과해 대응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예약 물량만 4만여 대다. 단순 계산하면 현 생산 능력으로 10개월이 걸린다.

현대차는 이 때문에 노조와 증산을 협의 중이다. 최선책은 시간당 생산 대수를 늘리는 것인데 1987년부터 단체협약에 따라 생산량 조정은 노조 동의가 필수다. 노조는 이 방안에 반대한다. 노조 관계자는 이날 본지에 "애초 사측이 수요 예측을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했다. 현대차는 당초 연간 내수 판매량을 2만5000대로 예측했다. 이어 "시간당 생산 대수를 늘리는 방식은 수당은 더 주지도 않고 근로 강도는 높아지기 때문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현대차 직원 1인당 평균 연봉(2017년)은 9200만원으로 일본 도요타(8344만원), 독일 폴크스바겐(8487만원)보다 높다.

이 때문에 현대차는 울산 4공장에서 혼류 생산(한 라인에서 여러 차종을 생산 방식) 중인 팰리세이드와 스타렉스의 생산 비율을 조정하는 차선책을 놓고 노조와 협의하고 있다. 울산 공장에서 매달 스타렉스 4000여 대, 팰리세이드 4000여 대를 만들고 있는데 스타렉스를 3000대, 팰리세이드를 5000대 생산하는 방안을 협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노사는 과거에도 증산 문제로 여러 번 갈등을 겪었다〈그래픽 참조〉. 특히 2006년엔 아산 공장에서 만드는 NF쏘나타의 생산량이 부족해 울산 공장에서 추가 생산하려 했지만 노조 측이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자동차 생산직은 근무 시간에 따라 임금을 받기 때문에 특근이 줄면 아산 공장 직원들의 수익이 감소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업계 관계자는 "고객들이 다소 불편을 겪더라도 생산직 직원들이 임금을 더 받는 게 중요하다는 논리"라고 지적했다. 2017년에는 소형 SUV 코나의 생산 물량을 늘리려다가 노조원들이 생산 라인을 쇠사슬로 묶어 컨베이어벨트를 멈추게 하기도 했다.

◇노조 허락받아 증산하는 건 한국이 거의 유일

증산을 위해 노조 동의를 받아야 하는 자동차 공장은 경쟁력 있는 글로벌 업체 중에서는 아주 드물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일본 도요타나 미국GM 등은 경영진이 판단해 수시로 증산을 결정할 수 있도록 노사 간 협약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쌍용차는 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한 2009년 이후부터 고객 주문량에 따라 차종별 생산량을 탄력적으로 조정하고 있다. 회사 관계자는 "작년 렉스턴 스포츠의 국내 판매량이 4만대를 돌파했는데 노조가 생산량 조정에 협조 안 했다면 10% 정도는 못 팔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 입장에선 증산 협의를 최대한 빨리 끝내야 북미 수출에도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 당장 4월부터 팰리세이드 미국 수출이 시작된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신차 효과는 6개월 정도라 초반에 확 팔아야 한다"면서 "모처럼 팰리세이드로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노조가 또다시 발목을 잡는 모습"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