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서울 역삼동의 공유주방 ‘심플키친’. 언뜻 보면 여느 쇼핑몰의 푸드코트와 비슷하다. 넓은 공간에 흩어진 주방 9곳에선 요리와 포장이 한창이었다. 푸드코트와 다른 점이라면 이곳에는 손님이 앉아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좌석이 없다. 공간 전체가 투명 칸막이로 구분된 4~5평(약 13㎡) 규모의 작은 주방들로 이뤄져 있다. 개별 주방에서 요리한 음식은 전부 외부로 배달된다.
심플키친은 외식 사업자에 주방을 빌려주는 공유주방이다. 외식 사업자는 한 달에 160만원의 이용료를 내면 4~5평 크기의 작은 주방을 사용할 수 있다. 이날 하와이 샐러드 전문점인 ‘서울포케’ 직원들은 시간 맞춰 찾아온 배달업체 직원에게 포장한 음식을 전달하고 있었다. 임태윤 심플키친 대표는 "강남에서 주방을 갖춘 식당을 창업하려면 최소 5000만원이 드는데 공유주방을 사용하면 초기 창업 비용과 고정비를 대폭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외식업계에 주방을 빌려주는 ‘공유주방’이 빠르게 늘고 있다. 공유주방이란 주방 설비와 기기를 갖춘 공간을 외식 사업자들에게 대여해주는 서비스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성장 중이며, 한국에서는 지난해부터 공유주방이 속속 생겨나기 시작했다.
공유주방은 외식 창업의 최대 장벽인 ‘공간’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이전까지는 식당을 운영하려면 공간이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주방을 갖춘 식당을 창업하려면 보증금(약 2500만원), 인테리어와 주방설비(약 2500만원) 등 초기 창업 비용만 적어도 5000만원이 필요하다. 여기에 식당을 낸 공간에 대한 임차료, 관리비, 식재료 구매비용, 배달 대행 수수료까지 비용이 만만치 않다.
공유주방은 시간당 사용료를 내고 주방을 빌리는 구조라 적은 비용으로도 누구나 외식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 월 160만원의 이용료와 보증금 1000만원이면 음식점 사장이 될 수 있는 셈이다. 여기에 15조원대로 커진 국내 배달 시장, 온라인 플랫폼 등 음식을 유통할 수 있는 경로가 많아지면서 식당 없이도 외식 사업을 운영할 수 있게 됐다. 공유주방 업체들은 우버이츠, 배달의 민족, 요기요 등 배달업체와 손잡고 음식을 배달하고 있다.
공유주방의 종류도 다양하다. 심플키친처럼 외식업체에 주방만 빌려주는 ‘배달 특화’ 공유주방부터 외식 사업자들에게 메뉴개발, 영업, 디자인 등의 교육 서비스를 제공해주는 업체까지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지난달 25일 서울 사직동에 지점을 연 ‘위쿡’은 입주 업체에 브랜딩, 마케팅, 메뉴 개발 등의 교육을 지원하는 ‘인큐베이팅 공유주방’을 운영한다.
‘키친서울’이라는 공유주방을 운영하는 오픈더테이블은 외부 업체에 공간을 대여해주는 대신 직접 셰프(요리사)를 고용해 외식 브랜드 10개를 개발하는 방향을 택했다. 개별 브랜드의 셰프들이 개방된 주방에서 한식, 일식, 중식, 양식 요리를 함께 하고 고객은 셰프가 만든 요리를 배달해 먹는 구조다. 미국에서는 이를 고스트키친(ghost kitchen), 또는 다크키친(dark kitchen)이라고 한다.
키친서울 관계자는 "브랜드끼리 식재료와 주방 운영 노하우를 공유하기 때문에 재료 낭비를 줄이고 위험을 분산시킬 수 있다"면서 "키친서울에서의 판매 데이터를 토대로 인기 제품을 가정간편식(HMR)으로 개발해 판매하는 등 사업을 확장하기에도 수월하다"고 말했다. 키친서울은 지난달 카카오벤처스, 비하이인베스트먼트 등으로부터 13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밖에 빵 전문 공유주방도 등장했다. 오티디(OTD)는 이달 중 서울 명동에 ‘공유 빵 공장’을 연다. 우버 창업자인 트래비스 캘러닉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클라우드 키친’이라는 공유주방을 선보인 데 이어 올해 안으로 한국에 2호점을 낼 예정이다. 이미 유명 맛집 10여곳 정도가 입점을 예약한 것으로 알려졌다.
치솟는 임대료와 인건비, 시장 포화 등의 여파로 외식업 불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공유주방이 미래 외식업의 한 형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공유주방을 운영 중인 업체만 12여개에 달하며, 올해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임태윤 심플키친 대표는 "공유주방이 시설과 경영을 지원하는 데다가 배달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고 있어 몇년 뒤 대부분 신생 배달 음식업체는 공유주방을 통해 창업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