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할 것 같으면 야반도주 말고 법원 오세요"

조선일보
  • 최종석 기자
    입력 2018.12.14 03:10

    정준영 서울회생법원 수석부장판사

    정준영 서울회생법원 수석부장판사
    /서울회생법원
    "요즘 매일매일이 안타깝습니다. 법정에서 우리 경제가 어려운 걸 직접 보고 있으니까요."

    최근 서울 서초구 서울회생법원에서 만난 정준영(51·사진) 수석부장판사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정 판사는 국내 최고의 회생·파산 전문가 중 한 명이다. 우리나라가 IMF 경제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진 1996~1997년 당시 서울지방법원 민사수석부에서 회사 정리 절차를 맡았었다. 1996년 접수된 우리나라 첫 개인 파산 사건의 주심이기도 했다. 한보그룹(1997년), 웅진홀딩스(2012년)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회생법원은 도산한 법인(회사)이나 개인이 재기할 수 있도록 채무를 재조정하는 일을 한다. 정 판사는 "최근 들어 회생·파산을 신청하는 기업이나 개인이 다시 늘고 있는데 특히 중소기업, 자영업자가 눈에 많이 띈다"고 했다. 2016년 이후 줄던 법인 회생은 올해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난해 1~10월 715건이었던 법인 회생 신청 건수는 올해 769건으로 늘었다. 아예 회사 문을 닫는 법인 파산은 최근 7년 새 가장 많다(668건). 정 판사는 "도산 6개월 전에만 법원에 왔으면 회생 절차를 진행할 수 있는데 너무 늦게 찾아오면 아무리 명의(名醫)라도 손쓰기 어렵다"고 했다. "기업 사장님들은 압니다. 몇 달 뒤면 망할 거라는 걸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혼자 버티지 말고 법원으로 와 주세요. 채권자들과 협의해 구조조정을 하고 당당하게 다시 시장으로 돌아가십시오."

    서울회생법원은 경기 침체와 최저임금 인상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중소기업을 돕기 위해 올 1월부터 맞춤형 회생 절차를 마련했다. 중소기업진흥공단, 금융투자협회, 한국자산관리공사 등과 연계해 원스톱으로 복귀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회사를 살려 재빨리 시장으로 내보내기 위한 '패스트 트랙'도 운영하고 있다. 절차를 최소화해 길게는 10년씩 걸리던 사건을 6개월여 만에 마무리할 수 있게 됐다. 채권자들이 회생 절차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회생절차협의회 제도도 신설했다. 개인들을 위해선 전문가들이 무료 상담을 해주는 뉴스타트 상담센터를 지난해 열었다.

    우리나라 회생·파산 시스템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평이 많다. IMF 경제 위기, 글로벌 금융 위기 등을 거치며 시스템이 지속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정 판사는 "IMF 경제 위기 등을 거치며 실패한 기업인의 경영권을 박탈하기보다 되살려 시장에서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게 더 낫다는 교훈을 얻었다"며 "기업이 되살아나면 그 실패는 오히려 혁신의 계기가 된다"고 했다. 지난해 서울중앙지법 파산부가 서울회생법원으로 출범하며 이름을 '회생' 법원으로 지은 것도 그런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하지만 아직도 큰 빚에 혼자 끙끙 앓다가 야반도주하는 사장들이 많다고 한다. 회생 신청을 사망 선고로 생각하는 사회적 편견이 문제라고 정 판사는 지적했다. 회생은 사망 선고가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게 정 판사의 지론이다. 회생 절차를 마친 기업들은 시장에서 M&A(인수·합병)도 잘된다고 한다. 부실이 정리되고 회사가 투명하게 공개돼 거래하는 입장에서 리스크(위험)가 줄기 때문이다.

    정 판사는 "기업이 살아야 근로자가 살고 가정이 살고 지역 공동체가 산다"면서 기업의 중요성을 누누이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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