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현지시간) 오후 3시, 미국 로스앤젤레스(LA) 공항에서 차로 한 시간 가량을 달리자 대형 쇼핑몰 ‘빌리지 앳 오렌지(The Village at Orange)’가 모습을 드러냈다. 핵심 상권인 오렌지카운티에 위치한 이곳은 2년 전만 해도 부촌(富村) 어바인 주민들이 즐겨찾던 곳이다.
하지만 이날 찾은 빌리지 앳 오렌지 쇼핑몰은 입구부터 사람이 거의 없어 썰렁했다. 쇼핑몰 안의 JC페니 백화점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도넛매장 직원 클라이레 앨렌씨는 "JC페니가 폐점한 후 1년 넘게 공실이 계속됐다"며 "바로 앞 점포라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우리 매장 매출도 타격이 크다"고 했다.
이 쇼핑몰에 있는 또 다른 백화점 시어스도 개점 휴업 상태였다. 3층으로 이뤄진 시어스 백화점엔 손님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직원이 쇼핑객보다 많았다. 매장에서 일하는 존 플러너씨는 "JC페니가 문닫고 나서 몰을 찾는 사람들 수가 확 줄었고, 그 영향으로 시어스에도 손님이 끊겼다"며 "직원들은 실직을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빌리지 앳 오렌지에서 25km 떨어진 실외형 쇼핑몰 ‘어바인 스펙트럼’도 사람이 거의 없어 분위기는 썰렁했다. 이곳에 있던 메이시스 백화점은 문을 닫고 없었다.
쇼핑몰 운영회사는 메이시스가 차지했던 대형 매장 자리를 5개로 쪼개 새로 분양하고 있었다. 그 중 한 자리에 패스트패션(SPA) H&M 점포가 새로 문을 열었으나, 나머지 공간은 텅 비어 있었다. H&M 바로 옆 자리엔 화장품 전문점 세포라가 내년에 들어설 예정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쇼핑몰을 찾은 셀리 수잔씨는 "유행이 지난 옷을 비싸게 팔던 메이시스가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싸고 스타일리쉬한 H&M이 들어와서 오히려 쇼핑하기 더 좋다"고 말했다.
◇아마존 공격에 생존기로 선 美 유통…작년 오프라인 6400개 폐점
미국 최대 소매기업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주요 백화점들이 파산하거나 점포 수를 줄이고 있다. 전국 오프라인 유통 매장 중 작년 한 해만 6400여개가 폐점했다.
아마존이 주도하는 전자상거래 바람에 제때 올라타지 못한 전통 오프라인 업체들의 위기를 보여준다.
대표적인 업체가 미국 최초 백화점 '시어스(Sears)'다. 시어스는 최근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126년의 역사와 '유통 공룡'으로서의 명성을 자랑했던 시어스 파산은 미국에 큰 충격을 줬다.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 거주하는 박정은씨는 "경기가 호황인데 100년 넘은 회사가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느냐며 우려하는 미국인이 많다"면서 "시어스 파산은 미국인들에게 상당히 충격적"이라고 했다.
시어스는 1886년 리처드 시어스가 우편망을 통해 시계와 보석을 파는 것으로 시작해 세계적 유통기업으로 자랐다. 우편망을 통한 쇼핑을 처음 시도한 점은 지금의 아마존과 닮았다.
시어스는 1906년 주식을 상장하고 1945년까지 연 10억달러(약 1조원)의 매출을 올렸다. 시어스백화점과 대형마트인 K마트 등 3700여개 매장과 30만명의 직원을 거느렸다.
1955년 '포천 500지수' 도입 당시에는 보잉, 제너럴모터스(GM) 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73년에는 당시 세계 최고 높이(108층·442m) 건물인 '시어스 타워'(현 윌리스 타워)를 세우는 등 미국 최대 유통업체로 군림했다.
하지만 100년 성공신화도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월마트 등 대형 할인매장에 손님을 빼앗기면서 2010년 이후 줄곧 적자에 시달렸다. 작년 초부터 1250개 매장 중 400여곳을 폐점했고 올 7월에는 본사가 있는 시카고의 마지막 점포 문을 닫았다. 앞으로 최소 150개 매장을 추가로 더 폐점할 예정이다. 시어스 주가는 올해만 85% 넘게 추락했다.
전문가들은 변화하는 소비 패턴, 온라인 발달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점을 실패의 원인으로 꼽는다.
시어스는 지난해 아마존과 손잡고 가전제품 온라인 유통에 나섰지만, 월마트나 타깃 등 경쟁사에 비해 디지털 혁신에 뒤떨어졌다는 지적을 받는다.
정동섭 딜로이트안진 부동산인프라자문그룹 전무는 "시어스는 고객들의 쇼핑환경과 트렌드가 계속 변하는데도 과거 성공에 취해 혁신하지 않았다"며 "이 탓에 아마존 등 온라인 유통 시장과의 경쟁에 밀려 고객 유출이 지속됐다"고 진단했다.
◇ 무너지는 메이시스·JC페니...구조조정·온라인 강화에도 이익 30% ‘뚝’
미국 1·2위 백화점 메이시스와 JC페니도 상황이 좋지 않다. 메이시스는 2013년 매출이 279억달러(약 31조원)에서 지난해 248억달러(약 28조원)로 11% 감소했다. 영업이익도 27억달러(약 3조원)에서 18억달러(약 2조원)로 33% 줄었다.
줄곧 적자였던 JC페니는 구조조정을 통해 2016년부터 흑자로 전환했으나 여전히 어렵다. JC페니의 지난해 매출은 125억달러(14조원), 영업이익은 1억달러(1124억원)에 그쳤다.
오프라인 유통업체의 위기는 고용시장에도 적지않은 후폭풍을 몰고 온다. 시어스는 약 7만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있는데, 이번에 파산을 신청하면서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했다.
BMO프라이빗 뱅크 통계에 따르면 올해 미국 백화점을 포함한 대형 판매점의 매출은 3.3%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통적인 오프라인 매장은 입지가 좋은 곳에 직원을 고용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든다. 반면 아마존처럼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매장은 기존 소매점에 비해 고객들에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팔 수 있다.
백화점과 할인점은 프로모션 등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서고 있지만 올해 영업이익률은 2.6%에 그쳤다. 이는 2013년(5.4%)에 비해 반토막 난 수치다. 지난 5년간 미국 대형 판매점 수는 연평균 1.4% 감소했다. 이는 7535개의 점포가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급격한 소비 트렌드 변화는 미국 유통업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명품’이라는 굳건한 입지에 기반을 둔 고급 백화점인 바니스 뉴욕·샥스앤피프스·노드스트롬 등은 아마존의 공격에 따른 타격을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하지만 중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은 온라인 쇼핑몰로의 고객 이탈이 가속화됐다.
전문가들은 아마존과 가격 경쟁에 밀릴 수 밖에 없다면 이를 상쇄할 만큼 소비자에 ‘경험’이나 ‘가치’를 주는 오프라인 매장으로 변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산업간 경계를 허물고 소비자 밀착형 서비스 회사로 변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안승호 숭실대 경영학과 교수는 “온라인 쇼핑몰 이용객이 늘고 전문점 전성시대가 오면서 백화점 매출은 크게 감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폐점을 통한 구조조정과 온라인 강화 등 발빠른 대처를 하지 않는다면 제2의 시어스가 나오는 건 시간문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