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재무라인이 또한번 삼성의 2인자로 선택됐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은 이상훈(62) 삼성전자(005930)경영지원실장(사장)이 이사회 의장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31일 이사회를 열고 차기 이사회 의장으로 이상훈 사장을 추천했다. 삼성전자는 최고경영자(CEO)와 이사회 의장을 처음으로 분리했다. 현 의장인 권오현 삼성전자 부회장이 엔지니어 출신의 '기술통'인 반면 이 사장은 삼성에서 전통적으로 중용됐던 '재무통'에 속한다. 권 의장의 임기는 내년 3월까지다.

삼성은 위기의 순간 때마다 컨트롤타워의 수장으로 재무통 또는 구조조정본부(비서실) 출신을 선택해 왔다.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선 '관리'의 정점에 있었던 구조본, 특히 재무 라인 출신이 적격이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이병철 창업주, 이건희 회장 등 오너를 보좌해 온 소병해, 현명관, 이학수, 김순택, 최지성 등 삼성의 ‘넘버2’는 모두 구조본을 거쳤으며 이중 소병해, 이학수 등이 재무통으로 꼽힌다.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전자를 이사회 중심의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여러차례 밝힌 만큼 이상훈 사장이 지휘봉을 잡게 될 삼성전자 이사회는 최고 의사결정기구로서 권한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 사장은 이재용 부회장이 상무이던 시절부터 가까이서 보좌하면서 두터운 신임을 얻은 이른바 ‘JY맨’으로 분류된다. ‘살림꾼’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삼성 경영 전반을 꿰차고 있다. 이 사장은 경북사대부고와 경북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 "이상훈 사장, 정통 재무라인 후계자"

이상훈 삼성전자 차기 이사회 의장.

이상훈 사장은 삼성 2인자의 ‘구조본' ‘재무통' DNA를 모두 지니고 있다. 구조본 재무팀(2004~2006), 전략기획실 전략지원팀(2006~2008)에서 전자 관련 계열사 운영 담당 임원으로 일했다. 2008년 6월 전략기획실이 해체되자 삼성전자 사업지원팀장으로서 전자 관련 계열사의 업무를 조정했다. 이 사장은 2008년 삼성전자의 OLED팀과 삼성SDI의 OLED사업부를 떼내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를 만드는 작업도 조율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최장수 2인자였던 이학수 전 부회장은 삼성에서 대표적인 재무통이었다. 이 전 부회장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회장비서실 사장으로 구조조정을 주도하며 삼성의 도약에 기여했다. 그 당시 재무 인력이 회사의 고속 성장을 이끌다 보니 ‘이학수-김인주-최광해’로 이어지던 전략 및 재무 라인이 삼성 내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다.

이상훈 사장은 이학수 전 부회장, 김인주 전 삼성경제연구소 사장, 최광해 전 전략기획실 부사장 등이 퇴진한 이후 삼성에 남은 재무라인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이 사장은 삼성이 어려울 때 구원투수로서 등판하며 존재감을 알렸다. 2014년 핵심 먹을거리였던 스마트폰 사업이 정체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그해 3분기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4조1000억원으로 전년동기대비 절반 이상 줄었다.

당시 삼성전자는 소프트웨어를 총괄하는 미디어솔루션센터(MSC), B2B(기업 간 거래)센터 등 각종 조직을 새로 꾸리고 글로벌마케팅실(GMO)을 확대하며 인력을 대폭 늘린 상태였다. 이 사장은 성과가 지지부진한 MSC를 해체하고, GMO의 예산을 대폭 감축하는 등 수술에 나섰다. 이 사장이 관할하는 재무·인사·감사·법무·홍보 등의 인력 10%를 구조조정하기도 했다.

조직 효율화의 성과는 이후 실적으로 연결됐다. 지난해 상반기 판매관리비는 전년보다 1조7800억원 가량 줄어든 10조8900억원을 기록했다. 지난해 영업이이도 1분기에 6조원, 2분기 8조원을 넘어서며 회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주력 스마트폰인 갤럭시S7의 성공과 더불어 이 사장이 추진한 영업조직 효율화 덕분이었다는 게 중론이다.

(왼쪽부터) 김기남 삼성전자 DS부문장(사장), 김현석 삼성전자 CE부문장(사장), 고동진 IM부문장(사장)

◆ 오너 경영철학 반영하고 신임 CEO들과 이사회 잇는 가교 역할할 듯

이상훈 사장은 이전의 재무·구조본 출신 2인자들과는 전혀 다른 임무를 맡게 될 전망이다. 전임 2인자들은 장막 뒤에서 각 계열사의 주요 경영에 깊숙이 관여했다. 반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는 이 사장은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이사회와 최고경영자(CEO)가 분리되는 이사회 경영 체제를 만들어 나가야 한다. 또 오너인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 철학 및 방침을 경영 전반에 반영하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삼성의 컨트롤타워 조직은 수장이 바뀌면서 성격도 조금씩 바뀌었다. 1959년 이병철 창업주 시절 비서실로 출발한 그룹 조직은 외환위기를 겪은 직후인 1998년 구조조정본부로 이름을 바꾸면서 이학수 전 부회장이 본부장으로 임명됐다. 2006년 다시 전략기획실로 개편하고 삼성특검 사건을 겪고 2008년 7월 해체됐다.

전략기획실은 2010년에 미래전략실로 이름을 바꾸고 부활했으며 김순택 실장(부회장)을 수장으로 임명했다. 기존 전략기획실이 재무·인사 등 ‘관리’에 치중하는 무거운 성격이었다면. 미래전략실은 조직 관리보다는 신수종 사업 발굴이나 창의적인 조직 문화를 만드는 등 그룹의 미래를 체계적으로 준비하는 역할을 강화했다.

재계에서는 경영 전반을 잘 아는 이상훈 사장이 신임 CEO 겸 사내이사인 김기남·김현석·고동진 3인 대표의 연착륙을 돕는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 이들 CEO는 각자의 분야에 정통한 ‘기술통’이지만, 이사회 일원으로는 처음 발을 딛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이 사장이 주주, 사외이사와의 관계, 재무적인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보면서 신임 사내이사들의 주요 의사결정을 도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