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전공하던 여학생은 베토벤, 드뷔시를 들으며 좌절했다. "나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 학교 수업 대신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고 영화관을 드나들며 "음악을 왜 저렇게 쓸까. 나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 텐데" 생각했다.
졸업 학기에 우연히 음악 작업을 맡은 행위예술 퍼포먼스 공연이 끝나고 기자 몇 명이 따라나왔다 "10년쯤 뒤엔 네가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 돼 있을 것 같아." 그땐 어리둥절했다. 방송 음악을 시작한 지 28년, 이제 '드라마 음악'에서 남혜승 감독은 '톱'으로 꼽힌다.
최근 그의 작품은 시청률 13%를 달리는 tvN 드라마 '도깨비'. 직접 작사·작곡해 넣은 라세 린드의 'Hush'와 정준일의 '첫눈'은 발매와 동시에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939년을 살아온 쓸쓸한 신(神)이 19세 도깨비 신부를 만나는 이야기에서 그가 뽑아낸 음악은 '터무니없는 설정'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내가 900년을 죽지 못해 살아온 도깨비라면 어떨까' 고민했어요. 도깨비 김신(공유)의 테마는 쳄발로를 이용한 바로크 음악으로, 고등학생 지은탁(김고은)이 나올 땐 리코더나 벨로 표현했지요."
남 감독은 1989년 EBS의 방송 음악 작가로 입사한 뒤 10년 이상 MBC '일밤' 등 코미디와 예능을 맡다가 작곡이 하고 싶어 어린이 프로그램 '뽀뽀뽀'로 건너갔다. "'뽀뽀뽀' 안에 모든 세상이 있었어요.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드라마타이즈…. 굉장히 좋은 공부가 됐죠."
남 감독은 하루에 25곡씩 한 맺힌 듯 노래를 만들어냈다. 어린이 프로그램은 대부분 디즈니 음악을 베껴 적당히 만들 때였다. 남 감독 음악은 100% 창작이었다. 방송가에 이름을 알린 것도 이때부터다. 2004년 MBC 드라마 '단팥빵'부터 드라마 음악감독이 됐다. 그렇게 시작해 지난해 '굿와이프'와 '질투의 화신'을 비롯해 '나인: 아홉 번의 시간여행' '로맨스가 필요해 2·3' '연애의 발견' 등 숱한 히트작이 그녀 손에서 태어났다.
베테랑이지만 음악만큼은 젊고 오히려 앞서간다. "비결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취향만은 확실한 편"이라고 했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에 동그란 색안경, 쉽게 소화하기 어려운 색의 셔츠를 입었다. "제 나이로 안 보이는 게 좋아요. 경력을 들으면 다들 부담스러워하니까." 양쪽 손목 안쪽과 손가락에 문신도 여럿이다. "지워지지 않는 문신이에요. 이쪽엔 기린 문신 하나 더 하려고요. 기린을 정말 좋아해서 혼자 동물원도 다녀요."
남 감독이 맡은 작품에는 같은 음악이 거의 없다. 매 회 매 장면 편곡이 모두 다르다. "슬픔에도 종류가 많잖아요. 1만큼 더 슬픈 거, 1만큼 더 기쁜 거. 쓸쓸하게 슬픈 건지, 애틋하게 슬픈 건지, 슬픈 척하는 건지…. 미묘한 차이가 있어요."
드라마 감독들은 그를 '뇌 변태'라고 부른다. 제작진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당장 만나자'고 하거나 "감정이 이해가 안 간다. 다음 스토리가 어떻게 되느냐"고 캐묻기 때문이다. '최고'라 불리는 지금도 목표가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잘한다는 말을 듣는다고 해서 버릇처럼 음악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새로우면서도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는 노래를 계속 만들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