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최순실 연루 사실이라면…" 글로벌 큰손, 韓國투자 줄일 조짐

입력 2016.11.27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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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재벌들 관련해서 돌아다니는 얘기가 사실로 확인이 된 겁니까? 의혹 수준인 건가요?”

얼마 전 만난 한 유럽계 연금 관계자는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거론되는 한국 대기업들에 관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확인 중이라고 했다. 그는 “지난 21일 국회가 9개 그룹 총수를 ‘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에 소환하기로 한 후 해외 투자 업계에선 정말 이렇게 많은 기업 총수가 연루되는 것이 가능한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며 “이 기업들이 최순실 측에 뇌물을 주고 특혜를 챙겼다고 밝혀진다면 한국의 대기업들은 많은 대형 연·기금들이 투자 제외 대상으로 분류하는 ‘부정부패 기업’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어 예의 주시 중”이라고 말했다. 그는 “9개 그룹 총수들이 부정부패에 깊이 연루됐다고 최종 결론이 날 경우 해외 연·기금은 어쩔 수 없이 해당 기업들에 대한 투자 비중을 줄이게 될 수 있다”고 했다. 재벌 기업이 광범위하게 연루된 최순실 사건이 한국 증시를 답답한 박스권에 가둬놓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의 또 다른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2경(京)원’ 굴리는 연기금들, “부정부패 기업엔 투자 안 한다” 약속

해외 연·기금들이 최순실 사건과 한국 기업의 관계에 큰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강조되는 ‘책임 투자 원칙’과 연관이 있다. ‘책임 투자 원칙’은 투자 업계의 ‘큰손’인 연·기금으로서, 주식을 보유한 기업들이 사회적인 책임을 지키도록 견제하겠다는 원칙을 뜻한다. 연·기금들은 자체적으로 정한 기준을 쓰기도 하지만, 유엔의 ‘책임 투자 원칙(PRI·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 약정서에 서명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엔 ‘뇌물 등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기업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항목이 들어 있다. 2006년 만들어진 유엔 PRI에 서명한 연·기금, 국부펀드 등 이른바 ‘자산 소유자’는 설립 당시 50개사에서 304개사로 늘었다. 이들이 굴리는 돈은 한국 자본시장 규모의 약 2배인 16조6000억달러(약 2경원)에 달한다.

글로벌 컨설팅사 ‘타워스왓슨’이 집계한 해외 연·기금 중 일본 국민연금(일본 연금 적립금 관리운용법인), 노르웨이 국민연금 등 상위권 회사는 대부분 홈페이지 등에 ‘책임 투자 원칙’을 공개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세계 2대 연금인 노르웨이 연기금(GPF) 토마스 세방 대외협력부장은 “노르웨이 연기금은 장기 투자를 원칙으로 하며 기업의 부정부패는 주가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 분류한다”며 “투자를 결정하는 위원들은 기업이 부정부패와 연루됐는지를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연기금은 올해 1월, 광범위한 뇌물 공여를 했다고 밝혀진 중국 휴대폰 부품 회사 ZTE를 투자 대상 기업에서 제외한다고 발표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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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 디스카운드 벗어나려면 ‘깨끗한 경영’ 필요

최순실 사태로 인한 국정 불안에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 이후 원화 가치 하락이 겹치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서 빠르게 돈을 빼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와 연루돼 총수의 이름이 거론되는 삼성전자(11월 1일 이후 순매도 4627억원), 현대차(321억원), SK텔레콤(408억원) 등 9개 재벌 그룹 관련주도 대부분이 외국인 순매도를 기록 중이다. 이 9개 그룹이 코스피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육박한다.

한국 기업과 투자 업계가 글로벌 금융시장의 화두인 ‘책임감 있는 투자’에 지나치게 무심해 한국 증시의 가치를 까먹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엔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깨끗한 기업’에 주로 투자하는 이른바 ‘ESG 상장지수펀드(ETF)’가 7개 상장돼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ESG는 환경(environmental)·사회(social)·지배 구조(governance) 이슈에 기업이 얼마나 책임감 있게 대응하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다. 연·기금 같은 ‘큰손’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에 주로 투자하므로 이 기업들의 주가가 더 오르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커지고, 투자도 활발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MSCI 미국 ESG 지수’는 지난 1년 동안 7.6%가 올라 미국 증시 대표 지수인 S&P500지수의 상승률(5.5%)을 앞지르고 있다.

한국에도 지난해 12월 한국거래소 주도로 ‘KRX ESG 리더스 150 지수’가 만들어졌지만, 이를 활용하는 투자 상품이 하나도 없어 ‘개점휴업’ 상태다. 지수 상승률은 ―4.9%로 코스피(―2.2%)보다 나쁘다. 홍콩에서 활동하는 네덜란드 연기금 운용사 APG의 박유경 이사는 “한때 부정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인도의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목표를 세우고 깨끗한 경영을 위해 노력한 결과 투자 업계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라며 “한국 기업과 투자회사도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탈피하려면 책임감 있는 투자 원칙의 기준을 더 엄격하게 세우고 지킬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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