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통화정책 일관성 없어…경제정책 방향 잡혀야 결정될 것"
"한은, 금리 인하 여지 생길 수 있지만 경제 뇌관 가계부채 감안해야"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 세계 금융시장이 '시계제로' 상황을 맞았다. 당장 주가는 급락과 급등을 반복하고 있다. 금과 같은 안전자산의 가격도 급등 후 하락하는 모습이다. 트럼프의 당선으로 경제의 불확실성이 매우 높아진 데 따른 시장의 혼란스러운 반응이다.
특히 미국 통화정책 방향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과 금융권은 기본적으로 올해 12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금리 인상과 이에 이어지는 완만한 금리 인상을 대비해왔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으로 이런 전망도 흔들리고 있다. 금융시장에서는 트럼프가 달러 약세를 통한 미국 수출 증대를 강조해 온 만큼 다음 달 금리 인상이 물 건너간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트럼프의 통화정책 방향이 오락가락하는 행보를 보이는 점도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있다. 그는 재닛 옐런 의장을 향해 "정치적인 이유로 금리 인상을 미루고 있다"고 수 차례 비판하면서 가파른 금리 인상을 시사하기도 했다. 또 정반대로 "금리를 인상하면 달러 가치가 상승해 미국 기업의 경쟁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며 저금리를 주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심지어 스스로를 '저금리 인간'(low interest rate person)으로 칭하기까지 했다.
시장에서는 트럼프가 확장적 재정정책 운용의 실효성을 거두기 위해 저금리 기조를 유지할 것이라는 관측과 함께 공공 인프라스트럭처 확대에 따른 자산거품 우려를 없애기 위해 금리 인상을 앞당길 것이라는 예상도 내놓고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통화정책 방향성을 종잡을 수 없는 만큼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신중한 대응을 주문하고 있다.
◆ "트럼프 통화정책 일관성 없어…美 12월 금리 인상은 유효"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통화정책의 방향성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면서 당분간은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트럼프의 통화정책 발언을 종합해보면 일관성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며 "실제로 통화정책을 어떻게 꾸려나갈 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신중한 입장을 보였다. 그러면서 "연준의 12월 금리 인상 여부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전망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도 "그동안 트럼프가 '저금리가 좋다' '금리를 인상한다' 등 혼란스러운 메시지를 던져왔다"며 "향후 미국의 경제상황에 맞게 통화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이지만, 지금 트럼프가 어떻게 금리 방향을 가져갈 지는 '알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 역시 1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경제현안점검회의에 참석한 직후 기자들과 만나 "금융시장은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오늘 하루 거래를 두고 이렇다, 저렇다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불확실성이 극도로 높아진 상황인 만큼 연준의 신뢰도를 지키고 시장을 안정시킨다는 차원에서 12월 금리 인상은 예정대로 진행될 가능성을 점치기도 했다.
LG경제연구원은 '불확실성 높은 트럼프 시대의 세계경제'라는 보고서를 내고 "미 연준 의장과 이사들의 임기는 보장돼 있고, 연준이 정치적 중립성을 표방하고 있어 금리 결정은 트럼프 당선과 직접적 상관없이 이뤄질 것"이라면서 "11월 고용지표가 크게 악화되지 않는 한 12월 금리는 인상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성윤 현대선물 연구원도 "연내 연준의 통화정책 기조의 급변 가능성을 기대하는 건 섣부르다"며 "연준이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정책 신뢰도를 잃지 않으려면 지표에 의존하는 정책 결정을 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경제지표들이 현재의 견조함만 유지한다면 12월 금리 인상은 유효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의 통화정책이 '패닉'(공포)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다. 박종연 NH투자증권 연구원는 "대선후보 신분이 아닌 대통령이 된 트럼프가 금리를 급격히 올릴 것이라는 전망은 과장된 우려"라면서 "미국의 통화정책은 우리보다 더 독립적이라 금리의 향방은 트럼프의 경제공약이 방향성을 잡으면 그에 맞게 결정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 "美 국채금리 0.25%P 오르면 외국인 자금 3개월만에 3조 빠져나가"
트럼프의 통화정책에도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주의' 기조라는 색깔이 짙어질 가능성은 높다. 이에 트럼프 정부가 '환율조작국' 카드를 무기로 대미 무역흑자 규모가 큰 한국에 대해서도 물밑에서 환율 절상을 요구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한국은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지정돼 있는데, 한 단계 더 높은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면 다양한 경로로 무역 제재를 받게 된다. 이미 환율조작국 지정 요건 3개 가운데 2개에 해당된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순매수 비중 2% 초과' 요건만 추가로 해당되면 바로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게 된다. 이렇게 되면 한국 외환시장에서 급격한 환율 절상 움직임이 있어도 이를 적극적으로 방어하기 힘들어진다. 또 미국 정부의 절상 요구가 있다면 이를 마냥 피하기도 어려워진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최악의 경우 한국을 환율조작 제재대상에 포함시켜 관세 부과 등 직접적 조치를 가할 가능성이 있으니 경상수지 흑자와 대미 무역흑자가 환율 개입과는 무관하다는 체계적 논리를 개발해 이를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트럼프 정부가 대선 공약대로 주한미군 주둔용 방위비 분담을 늘리고 대북 강경 노선을 걸을 때도 환율 불안이 야기될 수 있다. 한동안 금융시장은 대북 리스크를 심각하게 평가하지 않았는데, 대북 강경 노선을 천명한 공화당이 의회와 행정부를 독식한 상황이라 환율 등 금융시장도 과거와는 다르게 크게 흔들릴 가능성도 있다.
만약 트럼프가 빠른 속도로 금리를 인상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면, 내외금리차 축소로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 자금이 대거 유출될 가능성은 커진다. 트럼프는 1980년대 폴 볼커 미 연준 의장의 공격적 금리 인상 조치를 높게 평가하기도 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기준금리 인상으로 1년물 국채금리가 0.25%포인트 상승하면 우리나라의 외국인 주식투자자금은 3개월 뒤 3조원 규모가 유출되는 것으로 분석됐다.
김원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원은 "트럼프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악재가 동시에 발생할 경우 단기적으로 예상보다 큰 자금유출이 발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러한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자금 흐름에 대한 면밀한 모니터링과 함께 충격 완화 및 선제적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고민 깊어진 한은…전문가 "가계부채 등 불확실성 커 금리 동결 전망"
트럼프의 승리로 불확실성이 증폭된 미국의 통화정책이 한국은행에게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쏠린다. 만약 연준이 트럼프 당선으로 인한 글로벌 금융시장의 충격을 우려해 12월에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는다면, 한은이 국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할 여지는 커지게 되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경기는 생산과 투자, 수출 부진에다 삼성전자 갤럭시노트 7 단종 및 현대자동차 파업 등의 여파에 청탁금지법의 영향으로 얼어붙고 있다. 일부 민간 경제연구기관에서는 4분기의 전분기 대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돌아설 것이라는 우려마저 내놓고 있다. 미국이 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한다면, 꺼져가는 경기 회복의 불씨를 추가 금리 인하로 되살려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될 수도 있다.
다만 초저금리 장기화로 가계부채가 급등한 상황이라 무조건 금리를 내리기로 어려운 상황이다. 가계부채는 올해 상반기에만 54조원이 급증해 지난 6월 말 현재 1257조원을 넘어섰다. 각종 부동산 규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가계부채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어 우리 경제의 '뇌관'이 됐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전승지 삼성선물 연구원은 "환율이 오를 가능성이 높고 불확실성이 커져서 완화적 통화정책을 추가로 펼치기 어렵다는 의견과 내수부양이 필요하니 금리를 추가로 내려야 한다는 주장 모두 일리는 있다"면서도 "자본유출 우려와 가계부채 등을 감안하면 추가 금리 인하는 실효성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금리 동결에 힘을 실었다.
정성윤 현대선물 연구원도 "지금처럼 대외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환율이 불안해지면 금리 정책을 쓰기가 오히려 더 곤란하다"며 "한은이 불안요인이 실물지표에 반영이 되고 가시화 되는 내년 1분기 초까지는 금리 동결 기조를 가져갈 것"이라고 했다.
반대로 김소영 서울대 교수는 "미국 경기가 안 좋아지면 우리나라의 경기도 안 좋아질 가능성이 크고, 자본유출 가능성이 과거보다 줄어든 점을 감안하면 한은이 금리를 낮출 가능성이 커진 것은 사실"이라면서 "가계부채 등의 문제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금리를 인하할 여지가 생겼다"고 밝혔다.
최문박 LG경제연구원 책임연구원은 "한은의 통화정책과 미국의 12월 기준금리 인상 여부가 일대일로 매치(match·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완화적 통화정책에 대한 필요성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라고 분석했다. 아울러 최 연구원은 "이럴 때일수록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체력)이 중요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