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미국 하버드대 의대의 웬디 개릿 교수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사이언스'에 쥐의 소장(小腸)에 맛을 느끼는 단백질이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맛은 입으로 느끼면 충분하지, 소화기관인 소장까지 맛을 보는 것일까. 개릿 교수는 소장의 미각(味覺) 수용체는 다른 역할을 한다고 밝혔다. 회충이나 병원균이 침입할 때만 미각 신호가 급증한다는 것. 소장의 혀는 음식 맛을 보는 게 아니라 침입자를 감지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상처 치유 돕는 피부의 코
감각 수용체들이 우리 몸의 엉뚱한 곳에서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냄새를 맡는 후각(嗅覺) 수용체는 근육과 신장(腎臟), 심지어 정자에서도 발견됐고. 혈관에서는 시각(視覺) 수용체가 나왔다. 목의 기도(氣道)에서는 난데없이 쓴맛과 단맛을 감지하는 수용체가 확인됐다.
직장에서 희망한 부서가 아닌 엉뚱한 곳에 보냈다고 신세 한탄만 하며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감각 수용체는 다르다. 몸 밖의 환경을 살피던 것처럼 몸 안의 변화를 감시하고 있다.
감각 수용체가 원래 감각기관을 벗어나 다른 곳에 둥지를 튼 사례는 후각 수용체가 대표적이다. 1992년 벨기에 브뤼셀 자유대 연구진은 국제 학술지 '네이처'에 개의 정자에서 후각 담당 유전자가 작동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10년 뒤 사람의 정자에서도 후각 수용체 단백질이 발견됐다. 독일 보훔 루르대 연구진은 향기 분자가 정자의 후각 단백질을 작동시킨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특히 인공 백합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유는 아직 모른다. 연구진은 정자가 난자를 찾아갈 때도 후각으로 길을 잡는다고 추정했다.
피부에도 후각 수용체가 있다. 이번에는 백단향(白檀香)에 이끌렸다. 그러자 피부 세포들의 이동이 활발해졌다. 덕분에 상처가 빨리 아물었다. 근육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2009년 미국 에모리대 연구진은 정자에 있는 것과 같은 후각 수용체가 근육에도 있으며, 역시 향기 자극을 받고 근육세포들을 이동시킨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로 인해 근육 재생이 빨라진다.
◇혈관의 눈은 고혈압에 도움 줘
과학자들은 엉뚱한 곳에 자리 잡은 감각 수용체를 질병 치료에 이용할 수 있다고 본다. 신장의 후각 단백질은 장내 세균이 섬유질이 많은 음식을 분해할 때 나오는 지방산에 반응해 혈압을 떨어뜨린다. 그렇다면 섬유소가 많은 음식을 먹거나 아니면 이를 분해하는 장내 세균을 건강 기능 식품으로 먹으면 고혈압 치료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시각 단백질도 혈압을 떨어뜨리는 데 한몫할 수 있다. 사람 눈에는 '멜라놉신'이라는 빛 수용체가 있다. 햇빛의 양을 감지해 시간에 따라 몸의 생체 시계를 맞추는 역할을 한다. 2014년 미국 존스홉킨스대 연구진은 혈관에도 멜라놉신이 있으며, 청색 빛을 쪼이면 혈관을 이완시킨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이를 레이노드 증후군 치료에 쓰려고 연구하고 있다. 레이노드 증후군은 기온이 내려갈 때 손발 끝의 혈관이 지나치게 수축해 피부가 하얗게 변하는 병이다. 연구진은 청색 LED(발광다이오드)가 들어 있는 장갑이나 신발이 환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고혈압도 같은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다. 특히 기존 약물에 부작용이 심한 신생아의 고혈압 치료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쓴맛 감지력 따라 회복 속도 달라
미각 수용체는 고환·정자·기도·소장 등 사실상 우리 몸 곳곳에 있다. 미국 모넬 화학감각연구소와 펜실베이니아대 공동 연구진은 2014년 기도 위쪽에서 단맛 수용체를 발견했다. 당분을 만나면 같은 세포에서 쓴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를 억제했다. 단맛과 쓴맛 수용체는 외부 침입자를 감지하는 환상의 커플이다. 병원균이 기도에서 당분을 먹어 치우면 단맛 수용체에 결합할 당분이 줄어든다. 그만큼 단맛 수용체의 활동이 뜸해지고 반대로 쓴맛 수용체 활동이 늘어난다. 쓴맛 수용체는 병원균이 내는 쓴맛 분자를 잘 포착한다. 이에 따라 면역 시스템에 침입자 경고가 간다.
기도 위쪽에는 머리카락 같은 섬모(纖毛)가 있는 세포가 있다. 가래를 밖으로 밀어낸다. 여기에도 쓴맛 수용체가 있다. 병원균이 내는 쓴맛 분자를 감지하면 세포가 산화질소를 분비해 병원균을 죽인다. 또 섬모도 더 강하게 움직여 병원균을 기도 밖으로 밀어낸다. 펜실베이니아대 연구진은 기도에 미각 수용체가 많은 환자는 큰 수술을 받고서도 병원균에 감염되는 비율이 적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환자의 회복 속도를 미리 점쳐보는 진단법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