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2000년대 중반까지 글로벌 무대에서 명실상부한 IT강국으로 평가됐다. 이런 성과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면서 여야를 초월하여 광범위하게 국민적 지지를 끌어낸 정보화 리더 덕분이었다. 하지만 지난 10여년은 정보화 리더십 공백속에서 연구개발, 산업현장, 스타트업 생태계 등 IT 전분야에 걸쳐 글로벌 경쟁무대에서 중국에 크게 뒤처졌다. 조선비즈와 IT조선은 정보화리더십 2.0이 절실한 현 시점에 한국의 정보화를 이끈 개척자들의 리더십을 조명하는 시리즈를 준비했다.[편집자주]

◆ 오명은 누구인가…’한국의 정보통신 인프라 설계 주역’

육사 출신인 오명 전 과학기술 부총리(76)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질문의 요지를 차분히 메모했다. 그는 연도와 일시, 장소, 사람 이름 등을 일일이 언급하며 마치 어제 있었던 일처럼 설명을 이어나갔다. ‘소신’ ‘추진력’ ‘책임’과 같은 단어를 말할 때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TDX 개발 과정을 설명할 때는 배수진을 치고 진격하는 소령처럼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오명 전 부총리는 한국 정보통신 산업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다. 한국이 정보통신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데 밑거름이 됐던 정보통신 인프라를 설계한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는 5공화국 시절 대통령경제과학비서관을 거쳐 체신부 차관으로 일할 당시인 1982년 전기통신서비스 사업을 전담할 조직인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를 출범시켰고 이듬해인 1983년에는 데이터 통신 사업을 전담할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현 LG데이콤) 설립을 주도했다.

오 전 부총리는 오늘날 전자정부의 토대가 된 행정전산망 사업에 힘을 보탰고 전전자교환기(全電子交換機·TDX), 반도체(4MD램), 수퍼미니컴퓨터 개발사업 등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1996~2001년까지 동아일보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정보화 캠페인을 이끌었고 노무현 정부에서 과학기술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했다.

오 전 부총리는 경기고등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대학교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캠퍼스 대학원에서 전자공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88서울올림픽의 정보통신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총괄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교인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캠퍼스의 ‘유니버시티 프로페서’로 임명되기도 했다.

◆ 세계 최초로 데이터 통신 전담회사 만들어...정보화 강국 씨앗 뿌리다

“인터넷은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한국 인터넷 역사도 누구부터 시작했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도 없고 각 분야에서 기술이 조금씩 발전해 온 결과입니다. 인터넷이라는 기술(TCP/IP 기반의 통신망) 그 자체보다 정보화 혁명이라는 큰 흐름에서 인터넷 역사도 바라봐야 합니다.엑스”

오 전 부총리는 1980년대 초반 행정공무원으로 변신해 세계 처음으로 데이터 통신 전담회사 설립을 주도해 정보화 강국의 씨앗을 뿌렸다. 또 정보올림픽으로 불렸던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기획한 국가기간 전산망사업 등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한국 인터넷의 뿌리를 한국데이터통신주식회사(데이콤)이라고 주장한다. 1980년대부터 오늘날 빅데이터와 사물인터넷(IoT) 서비스의 근간인 ‘데이터 통신’을 정책적으로 키운 것이 한국이 정보화에서 앞서가는 초석이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1982년 12월 10일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가 법인형태로 출범했다. 민간 통신의 시발점으로 평가받는다. 당시 체신부 산하 153개 기관의 3만 5000여명이 통신공사로 자리를 옮겼다.

뉴욕주립대에서 전자공학 박사 학위를 받고 1972년 귀국해 육사 교수와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근무하다 행정 공무원으로 변신합니다.

“1980년대 전두환 대통령 시절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작고)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김 수석은 통신 산업과 전자산업 육성에 관심이 많았는데, 적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내게 함께 일할 것을 제의했습니다.”

1980년 10월부터 8개월 동안 대통령 경제수석비서실 과학기술비서관(2급)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당시 청와대 분위기는 어땠습니까.

“청와대 우리팀(경제수석비서실 경제과학비서팀)에는 이상하게도 전자공학 전공자들이 많았고 전자공업 육성이 화두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중화학 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면 전두환 대통령 시대에는 전자공업 육성 정책이 주목받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방식이 유효했던 시기였지만 오히려 우리 팀은 전자공업 육성 정책의 중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데 노력했습니다. 일례로 1981년 3월 ‘전자공업육성을 위한 장기정책’을 만들었는데, 이 정책의 당위성과 중요성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자산업이란 무엇인가’ ‘반도체란 무엇인가’라는 소책자를 많이 만들어 공무원 사회와 기업에 뿌리면서 홍보 활동을 했어요.”

데이터통신 전담회사를 전화사업과 따로 떼어내 운영한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체신부 인력 8만명 중 5만명을 떼어 내 전기통신공사를 만드는 밑그림을 그릴 때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본은 전기통신공사를 NTT(국내 통신)와 KDD(국제 통신) 두 개 회사로 분리했어요.

우리도 처음에는 일본처럼 국내 통신과 국제 통신을 담당할 회사 2개로 설립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금 정산, 접속 표준 문제 등 비효율적인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국내외 통신 서비스를 모두 제공하는 회사 1개를 만들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입니다.

대신 앞으로 데이터 통신이 중요해질 테니 데이터 통신만 전담하는 회사를 공사 형태가 아닌 주식회사 형태로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한국데이터통신( 데이콤)이라는 데이터통신 회사가 세계 처음으로 탄생한 것입니다.”

일본을 벤치마킹하던 시절에 일본과는 다른 길을 가겠다는 독창적인 결정 덕분에 정보화 만큼은 우리나라가 일본을 앞질렀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 요인도 있었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가 2000년대까지 정보화 계획을 세워 일관되게 추진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6년 2개월 차관(최장수 차관)을 하고 5공화국, 6공화국 장관을 했기 때문에 최소 8년 동안 한 사람이 장기 계획을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계획대로 왔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달리 혼선을 겪지 않고 발전을 해 올 수 있었습니다.

KT 설립, 데이콤 설립,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설립,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설립, 한국전산원 설립 등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동참시키고 정보화 운동을 20년 동안 꾸준히 진행하면서 국민의 정보화 수준도 높아졌습니다.”

◆ 서울올림픽 성공 자신감으로 국가 행정 전산망 통합 이끌어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을 맡고 계셨던 1993년부터 국가망 전산화에 본격적으로 나섰습니다. 1500억원 규모의 행정전산망 통합화 프로젝트의 규모가 가장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만 해도 각 부처가 제각각 IBM 컴퓨터로 전산시스템을 구축하는 식이었습니다. 각 부처가 전산을 잘 몰랐던 시절입니다. 1993년 행정망, 금융망, 교육연구망, 국방망, 공안망 등 5대 공공 부문 전산화 계획이 만들어지고 행정전산망부터 손을 댔습니다.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자신감 덕분에 행정전산망 통합화에도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각 부처에서 독립적으로 운용하던 것을 청와대팀이 중심이 돼 기간 전산망으로 묶으면서 부처 반발이 정말로 거셌습니다. 당시 온 나라가 IBM 중심으로 돌아갈 때인데, 오픈 소스였던 유닉스 운영체제를 과감히 선택했습니다. 유닉스를 선택하면 IBM 컴퓨터뿐 아니라 다른 모든 컴퓨터에도 연결할 수 있었거든요.”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것과 행정전산망 통합 사업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올림픽을 치르려면 대회 경기 운영 시스템, 종합 정보망 서비스, 대회 관련 지원 시스템 등 엄청난 규모의 통신 및 전산 시스템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1984년 LA올림픽 때 썼던 소프트웨어(실제로는 그보다 8년 전인 몬트리올 올림픽 때 사용)를 구매해 서울올림픽에도 쓰자고 했습니다.

체신부 장관 재임 중에 치러진 서울올림픽에서 12년이나 된 낡은 프로그램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당시 체신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조건으로 대회 운영 시스템과 소프트웨어를 국내에서 개발하는 것으로 결정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정보화 올림픽으로 평가받는 서울올림픽 때 최고의 서비스는 해외에서 서울올림픽 대회전산시스템 데이터베이스에 접속해 지금 인터넷처럼 각종 자료를 받을 수 있는 ‘윈스(WINS)’였습니다. 마치 뉴욕타임스 데스크가 뉴욕에 앉아서 경기 결과를 받아볼 수 있도록 한 셈인데, 인터넷과 같은 개념의 데이터 통신 서비스를 처음 선보였던 것이지요.

윈스는 이용태 박사(전 삼보컴퓨터 회장)가 사장으로 있었던 데이콤이 개발한 것이었습니다. 데이터 통신 전담회사를 별도로 만들었던 게 이 때 빛을 발한 셈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오픈소스 운영체제인 유닉스를 선택해 개별 부처의 모든 컴퓨터를 연결하자는 아이디어는 서울올림픽 때의 ‘윈스’에서 나왔습니다. 데이터를 서로 편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통합 행정전산망을 구축해야만 제대로 된 의미의 행정전산망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서울올림픽 때의 경험이 정보화의 꽃인 행정전산망 구축에 도움이 된 것입니다.”

한국데이타통신이 WINS를 운영하는 모습(왼쪽). 88서울올림픽 통신운영 성공다짐대회.

결국 데이터 통신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예상이 올림픽이나 행정전산망 통합 사업에서 들어맞았군요.

“네, 그렇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1980년대 데이콤에 정보문화센터(1984년 정보통신훈련센터로 설립, 1988년 정보문화센터, 2003년 한국정보문화진흥원으로 확대 개편, 2009년 정보화진흥원에 통합)라는 것을 만들어 20년 동안 정보화 운동을 꾸준히 했다는 점입니다.

서울에서 농어촌까지 지역 사무소를 만들어 국민에게 정보화 중요성을 알렸어요. 또 한국이 정보화 사회 진입에 필요한 국민 교육을 1993년 대전 엑스포를 통해 했습니다. 당시 일반 가정에 PC가 없을 때였는데, 대전 엑스포 행사장에 PC 2000대를 설치해 누구나 만져볼 수 있게 했고 가상현실과 같은 컴퓨터 예술과 같은 첨단 분야도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게 했습니다.”

―체신부 차관 시절인 1982년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세계에서 10번째로 한국형 전전자교환기(Digital Electronic Switching System) 'TDX' 개발에 성공했습니다. 이 기술은 1가구 1전화 시대를 연 기폭제가 됐습니다.

“짧은 시간에 조직 개편을 완성하고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240억원을 들여서 TDX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삼성, LG, OPC, 대우 등 4개 그룹에 관련 엔지니어를 전자통신연구원으로 파견해 연구원과 공동 개발하도록 했지요. 국가가 돈을 대고 기업에 있는 연구원까지 자출해서 국가 총력체제. 국가 역량을 집중한 셈입니다. 훗날 4개 회사에 TDX 생산 물량을 나눠줘서 국가가 구매하도록 해 시장까지 만들어줬습니다. 정부가 주도한 이 모델은 4메가 D램, 수퍼미니컴퓨터, 행정전산망을 넘어서 CDMA(코드분할다중접속)까지 이어지지요.”

― 체신부 차관 시절에 당시 전국통신망 아이디어도 나왔지요?

“많은 고민 끝에 한국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전국민이 정보획득 수단과 요금면에서 똑같은 혜택을 받도록 하자’고요. 정보사회가 산업사회보다 풍부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점은 모두가 동의하지만, 도시와 시골의 정보 격차가 벌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 전국의 통신요금을 위치에 관계없는 하나의 요금체계로 만들고, 도시·농어촌 구별없이 전국의 통신 시설을 같은 수준으로 공급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습니다. 예산당국과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새로 시작하는 서비스의 경우, 전국을 한 통화권으로 하는 정책을 관철시켰습니다.”

◆ ‘직업이 장관’...”힘 없는 미래부 아쉬워”

현재 통신 서비스 시장을 볼 때 아쉬운 점은 없습니까.

“통신 서비스는 전문업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데이콤을 처음 만들 때 어느 그룹도 지분 7%를 초과해 소유하지 못하게 정관에 넣었어요. 그런데 데이콤은 LG로 넘어갔고 결국 LG유플러스로 통합됐지요.

이동통신주식회사도 SK그룹에 넘어갔습니다. 재벌기업이 통신 사업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물론 재벌기업이 가져갔기 때문에 그만큼 빨리 성장한 것은 인정해야겠습니다만, KT나 데이콤, SKT가 독립적인 통신 전문 회사로 세계 굴지의 통신 회사가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직업이 장관'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80년대 이후부터 여러 부처를 거쳤습니다.

“1980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실 과학기술비서관을 맡으면서 행정 부문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습니다.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체신부 차관, 1987년 7월부터 1988년 12월까지 체신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이후 1993년 교통부 장관, 1994년 건설교통부 장관을 지냈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인 2003년 말부터 2006년 2월까지 과학기술부 장관 겸 과기부총리를 맡았습니다.”

2004년 9월 오명 과기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이 2003년도세입세출결산 상임위에서 진대제 정통부 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한국정보통신 정책이 2000년까지는 일관되게 이어져 왔습니다. 2008년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정보통신부가 해체되면서 정보화 혁명의 빛이 바래졌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정통부를 없애면서 컨트롤타워가 없어진 것은 맞습니다만, 지금은 누가 나서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41세 때 차관을 했는데, 청와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10년 동안 겁 없이 이끌고 나갔습니다. 데이콤을 만들 때도 ‘오명이 자기 회사 만든다’고 비판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추진했습니다.

현재 시점에서는 예전 방식이 통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다만 원로 그룹 의견과 경험이 정책에 잘 반영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의 트렌드는 지난 정권 사람이 새 정권에서는 별로 말을 못하는 분위기인 것 같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2013년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미래창조과학부가 출범했습니다.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미래부를 출범시킨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미래부 부총리 부서로 신설해서 좀 더 강력한 부처를 만들었어야 하지 않았냐는 아쉬움은 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일개 차관이 TDX부터 국민 교육 과정까지 끌어내고 4개 부처 장관을 한 경험까지 고려해 제게 부총리 겸 과학기술부 장관을 맡겼습니다. 부총리할 때 예산권도 가졌고 외교부 장관이든, 국방부 장관이든 필요할 때는 언제든 불렀습니다.

2004년 러시아와 우주기술협력협정을 체결하고 우주발사체 사업이 본격화하는 시점이었는데, ‘선진국 가는 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시고 저한테 맡기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정도 리더십과 소신을 갖고 끌고 나가면, 지금 미래부가 할 일이 굉장히 많습니다.”

ISDN망을 이용해 PC동화상 회의까지 할 수 있는 한국통신의 차세대전자교환기 TDX-100의 시연회가 1999년1월26일 서울 가좌분국에서 열렸다.

1982년 당시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로 불린 TDX(전전자교환기) 개발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선진국이 TDX를 매우 비싸게 팔았기 때문에 국산화해보자는 논의에서 출발했으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컬러TV도 제대로 못만들 때여서 체신부 내에서도 갑론을박이 많았다.

당시 오명 체신부 차관은 한국전기통신연구소(현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최순달 소장(전 체신부 장관), 경상현 연구부장(부소장급)(전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TDX를 개발하는 데 필요한 예산이 얼마인지 물었다. 총 240억원 규모의 예산안을 들고 온 연구자들에게 오명 차관은 “실패하면 어떻게 하겠냐”고 물었다.

최 소장이 “실패하면 사표를 쓰겠다”고 답하자 오 차관은 “그런 말은 누구나 한다. 단군 이래 최대 프로젝트인데 실패하면 역사의 죄인이 된다는 심정으로 해달라”고 비장한 각오를 주문했다.

하지만 당시 경제기획원이 TDX 개발 비용을 편성하지 않았다. TDX 연구개발 예산 확보가 어려워지자 오 차관은 체신부가 한국전기통신공사를 출범시키면서 만든 규정을 활용했다. 이 규정은 ‘체신부에서 독립된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연 매출의 3% 이상을 연구개발비로 투자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었다. 오 차관은 한국전기통신공사가 의무적으로 조성한 연 매출 3%의 연구개발 비용을 TDX 연구개발에 투입했다.

양승택 박사(전 정보통신부 장관)가 개발단장을, 서정욱 박사(전 과학기술부 장관)가 사업단장을 각각 맡았다. 오 전 부총리는 서 박사에 대해 매우 치밀하고 까다로운 사람으로 기억한다. 서 박사는 시험 제품을 비닐봉지에 싼 뒤 헤어드라이어로 바람을 넣어가면서 품질을 검증했다. 원래 국방연구소에서 무전기 개발을 담당한 서 박사는 시베리아나 열대 지방에서도 쓸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는 습관을 TDX 개발에도 적용한 것이다.

서 박사는 TDX 개발 과정의 품질 보증과 폐기 관리까지 완벽하게 진행했고 그런 노하우들이 제품 개발에 참여한 기업인 삼성전자나 LG전자 등에 전해졌다. 또 TDX와 같은 방법론으로 4메가 D램, 수퍼미니컴퓨터, CDMA(부호분할다중접속), 와이브로, DMB(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 상용화도 추진할 수 있었다.

당시 TDX 기술개발을 책임진 전기통신연구소 소장, 선임연구부장, 관련 부서 실장들은 ‘시분할 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만약 개발에 실패할 경우 어떠한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체신부에 제출했고 연구원들이 그 사본을 회람했다. 이 서약서는 오늘날 ‘TDX 혈서(血書)’라고 불린다. TDX 개발에 참여한 최순달 소장은 체신부 장관, 경상현 부장과 양승택 개발단장은 정보통신부 장관, 서정욱 사업단장은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