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이코노미] 안동 자본주의

조선비즈
  • 모종린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교수
    입력 2016.02.03 04:00

    외국인 학생을 많이 가르치는 필자에게 안동은 고마운 도시다. 그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이 유적과 일상 곳곳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안동은 겉모습에서부터 가장 한국답다. 서원, 서당, 사당, 종가 등 유교 건축물이 아름다운 자원과 어우러져 독특한 도시 경관을 자아낸다.

    도시를 가득 채운 옛 건축물처럼 유교 문화 역시 생활 속에 살아 숨 쉰다. 안동의 집성촌에는 아직도 유교 법도대로 생활하는 유학자와 선비가 살고 있다. 그들을 통해 하루 24시간 공부하고 수양하던 옛 선비를 떠올리면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후세 교육, 평생 학습, 자기 수양, 도덕성, 청렴 등 한국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사실 우리의 전통적 가치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가치에 대한 질문과 논의에 인색해졌다.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세대가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해하는 젊은이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 돌아보지 않는 이가 젊은 세대에게 “너의 길을 가라”고 조언할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정체성의 위기는 비단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깊이 들여다보면 한국 경제의 위기가 정체성 상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한국은 선진국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달려왔다. 1960년대 이후 ‘부국강병’이 한국 경제의 유일한 슬로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진국 기업을 추월하겠다는 목표로 앞만 보고 내달리는 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놀랄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글로벌 금융 위기는 한국 경제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가져왔다. 미국식 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미국을 모델로 성장해온 한국 경제의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었다.

    그 동안 한국 경제가 추구해온 방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기존의 주력 산업 분야에서 중국 기업의 추월이 두드러지는 상황 속에 수출 기업을 지원하는 방식으로는 경제 성장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의 재건은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질문과 진단을 통해 한국 사회의 현재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미래를 그려야 한다. 정체성이 뚜렷한 사회에서만이 열정과 소명의식, 자립심 등의 윤리와 가치 덕목이 발현된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요소에는 전통도 포함된다.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가 제기한 아시아적 가치 논쟁을 통해 교육, 근면, 질서, 책임, 가족, 복지 등의 유교 가치가 한국과 동아시아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유교 문화는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바를 제시하는 정체성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장이 지적한 것처럼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중국의 부상은 유교를 통한 정체성 확립을 더욱 시급한 과제로 만들고 있다.

    안동 병산서원의 입교당 마루에서 바라본 만대루와 그 넘어 보이는 병산 전경. 지금의 경제 위기는 가치관과 정체성의 위기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한국인이 공감하는 가치와 윤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기업가상과 경제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의 숙제지만, 안동이 '한국 정신 문화의 수도'로서 한국식 자본주의 모델의 이념을 제공해야 한다.
    유교 전통과 선비정신을 가장 먼저 수용해야 할 집단은 기업가들이다. 2015년 아산서원이 발간한 <한국문화 대탐사>에서 인용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전통적인 선비정신 가운데 한국인이 지도자에게 바라는 가치는 수기와 청렴인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지도층이 지나치게 물질을 추구하고 이기적이라고 보는 국민의 인식이 이를 통해 드러난다. 기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는 과도한 물질주의와 이기심이 초래한 가치의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도전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이 부족하다고 비판 받는 3~4대 대기업 경영인들은 유교에서 새로운 기업가상을 찾아야 한다. 1세대 창업자가 가족주의, 사내 화합, 국민 경제 건설 등 가족주의적 유교 가치를 실현했다면, 3~4대 경영인은 학습, 수양, 청렴, 공동체 정신 등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가 간과한 유교 가치를 실현하는 것을 과업으로 삼아야 한다.

    자본주의 윤리와 기업가 정신을 정립하는 데만 유교 전통이 유효한 것은 아니다. 유교 전통 자체가 새로운 지역 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다. 안동은 이미 세계 유교 관광의 대표적인 모델이다. 하회마을, 도산서원, 병산서원, 안동민속박물관 등은 유교 자원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한 창의적 사례다. 또한 안동시는 최근 ‘구름에’ 고택 리조트를 통해 한옥에 기반한 고급 리조트 문화를 개척하는 등 전통문화의 현대화를 선도하고 있다.

    아쉬운 사실은 안동이 ‘안동 자본주의’를 관광산업에만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욕심을 내야 한다. 전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고유의 철학을 가진 기업이 절실한 지금, 안동이 유교를 기반으로 한 ‘한국적’ 기업을 육성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지역의 힘만으로 그러한 기업을 배출하기 어렵다면, 유교 철학을 바탕으로 한 기업의 전형을 연구하고 교육하여 이를 전파하는 데 힘써야 한다. 안동대학교, 한국국학진흥원 등 안동의 교육기관은 유교적 경영 철학과 인재 육성 교육을 특화하고 상업화함으로써 독특한 위치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한국식 자본주의 모델을 정립하는 것이 지금의 경제 위기를 타개할 해법 중 하나다. 한국인이 공감하는 가치와 윤리를 기반으로 새로운 기업가상과 경제 운영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는 한국 사회 전체의 숙제지만, 안동이 '한국 정신 문화의 수도'로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안동 자본주의’ 모델로 한국식 자본주의 모델의 정립에 기여하는 일이 안동의 과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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