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어 거창하게 ‘공동체의 이상’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고, 세상이 너무도 각박해서, 아끼는 귀한 젊은이들마저 부대껴 마모되지 않기를 소망했다. 그런 이들이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곳, 잠시라도 숨 돌리고, 자기도 돌아보고 세상도 돌아보는 그런 자리를 하나 만들고 싶었다.
저 맑고 귀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굳게 서주기를, 저 혼자만 살겠다고 남들을 밀쳐내는 것이 아니라 저도 살고 남도 살리는 지혜를 깨쳐주기를 간절히 바랬다. 그것이 서원을 짓는 이유이기도 하다.
콘도며 펜션, 리조트, 온갖 연구소도 널려 있는 세상에서 굳이 서원이라는 형식을 택한 것은, 지켜가야 할 것이 많은 것 같아서였다. 우리는 잃어버린 것이 너무 많다.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을 탓하고 공격하는 데는 능란하지만, 사람 도리 하고 살려는 자세라든지, 옷깃 여미며 자신부터 돌아보는 자세라든지, 선공후사(先公後私)의 당연한 도리라든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의 여백서원(如白書院)은 그런 마음에서 생겨났다.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의 맑은 뜻 위에 자비(自費)와 주변의 도움까지 더해 작년 10월 문을 열었다. 천정을 가로지른 대들보에는 ‘맑은 사람을 위하여, 후학을 위하여, 시를 위하여’라고 적어놨다. 서원의 모토다. 말 그대로다.
전 교수는 여기서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찾아오는 손님도 맞는다. ‘오마토’와 ‘시마토’라고 해서 5월과 10월 마지막 토요일에는 학교 수업으로 인연 맺은 제자들과 정례 모임도 한다. 책을 읽고, 밥도 해 먹고, 각자 세상 사는 이야기도 나누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날이 새기 일쑤다.
직접 찾아가보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작년말에 출간된 그의 책 ‘인생을 배우다’를 읽고 나서였다. 지금까지 수십 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써낸 전 교수지만 에세이집으로는 첫 책이다. 지금껏 수많은 학생과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전해온 그가 ‘살아오면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들’을 일기처럼 적어놨다. 한 부분을 옮겨보면 이렇다.
괴테 탄생 250주년이던 해 여름,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념 학회에서였다.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 감사였던 홀레 씨는 사람들을 아끼고 인연을 중히 여기는 분이었다.
몇 해 전 성탄절 무렵, 나는 그 댁을 찾아 격식을 갖춘 식탁에서 홀레 씨 내외와 함께 식사를 했다. 편찮으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홀레 씨는 그날 평소와 다름없이, 아니 더욱 단정하게 정장을 하고 식탁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마치셨다. 후식을 들 차례가 되었는데 정중하게 아주 미안해하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중에 들으니 당시 홀레 씨는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심폐기를 달아야 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며칠 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위중한 상태로 아무 일 없다는 듯 손님과 정중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의 메인 코스를 마치신 것이다.
서울의 학교로 돌아오니, 책 200여 권이 담긴 상자들이 항공우편으로 도착해 연구실에 높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홀레 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내신 것이다. 내가 괴테 공부를 한다고 괴테의 ‘서·동 시집’ 초판본(1819년), ‘파우스트’ 희귀본을 전해 주셨는데, 이제 그와 같은, 그 가치를 평가조차 할 수 없는 귀중본들이 담긴 상자들이 또 온 것이었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들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 씨는 가장 귀중한 책들을 내게로 보내셨다. 그 책들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던지.
나는 홀레 씨 말고도 아름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삶 자체로 기쁨이고 선물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든든한지. 그들의 아름다운 삶을 전하고 싶은 욕심, 어쩌면 그것이 이 책의 시작이었을지도 모른다.
30년 가까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젊은 시절 나는 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리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무얼 좀 배우고 싶었고, 그냥 무슨 수 쓰지 않고 내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세상이 무법천지 같아 살아가기가 막막하고, 무슨 수든 쓰지 않고는 못 살 듯하지만, 살아보니 바르다고 생각하는 대로 살아도 살아진다. 남을 배려하고 격려하며 살면, 조금 더 잘 살아진다. 쓸데없는 계산하느라, 남들과 비교하느라 힘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면 제법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기도 하다. 내가 거쳐 온 시간이, 내가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것을 깨닫게 했다.
찾아가서 그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서원은 서울에서 차로 1시간 반쯤 걸리는 곳에 있었다. 마을 주민회관 앞에 이르러 전화를 하니 먼 발치에서 전 교수가 마중을 나왔다. 목과 팔 쪽이 늘어진 줄무늬 스웨터에 무릎이 튀어나온 작업용 바지 차림. 교수님의 아우라는 어디로 가고, 밭 매다 온 시골 아낙 같은 분이 먼 데서 온 손님을 반겼다.
“여기가 우전(友田)입니다. 손님들이 오면 여기서 찻잎을 따서 갖고 들어갑니다. 그걸 뜨거운 물에 우려내 대접하지요.” 서원 입구 자그마한 주차장 옆에 그보다 작은 텃밭이 있었다. 전 교수는 우뚝하게 자란 식물의 잎을 한움큼씩 따서 챙기고는 서원으로 앞장섰다.
입구에 우람한 비석이 가로놓여 있었다. ‘如白서원’이라는 글자를 새긴 뒷면에는 이름들이 빽빽하게 적혀있다.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이다. 와공, 구들공까지 적어 넣었다.
“여기 있는 것들은 사연이 없는 게 없어요. 이 비석은 이웃에 조각가 한 분이 있는데, 사모님이 작품에 쓰라고 준 돌을 이곳 서원 비석을 장만하는 데 내놓으셨어요.” 함께 걷는 내내 전 교수의 ‘사연’이 이어졌다.
“여기는 나무 고아원이에요. 그냥 보면 번듯한 것들을 사서 심은 것 같지만, 계단 틈 같은 곳에 나서 제대로 자라지도 못하는 것들을 구출해서 옮겨 심고 한 것들이 많아요. 한 10년 되니까 이렇게 많이 컸어요.”
나무들도 이름이 있다. 아버지를 기린 여백송, 잔가지가 많은 후학송, 어머니를 생각하고 심은 모송, 가운데가 구불구불한 시송, 괴테송… 그야말로 작은 식물원이다. 뒷마당은 제법 널찍해서 공연을 하거나 캠프파이어도 할 수 있게 돼있다.
-여백(如白)이 무슨 뜻인가요?
본래 아버지 호입니다. 성품이 맑다고 친구분들이 지어준 거지요. 저는 이 서원이 말 그대로 ‘여백 같은 공간’인 동시에 ‘맑은 사람들을 위한 집’이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서 이름을 따서 붙였습니다.
아버지가 2010년 12월 돌아가실 때 91세였어요. 킬리만자로는 세계 두 번째 고령 등정 기록을 세웠고, 돌아가시기 전 해까지 매년 에베레스트에 오른 분이셨지요. 일찍 부친을 여읜 아버지께서 증조부(부친의 할아버지)를 많이 따랐는데 증조부께서는 향리에 아름다운 정자를 지었어요. 증조부는 아주 잠깐씩 도산서원과 소수서원 원장도 지낸 선비였어요.
구석구석에 싯구를 적어 놓은 돌판들이 보인다. 독일 현대 시인 라이너 쿤체의 시들이라고 했다. 뒤에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전 교수의 독일시 스승이기도 하다.
5분여를 올라가니 자그마한 정자가 보인다. ‘詩亭(시정)’이라고 적혀있다. 현판 글씨는 부친의 것이다. “아버지가 시(詩)라는 한자어를 좋아했어요. 문자를 쪼개 보면 말씀(言)인데, 흙(土)에서 나와 마디(寸)만 한 것이라는 뜻이 되잖아요. 시라는 말이 함축한 것을 잘 나타낸 것 같아요.”
“여기서 10년 동안 글을 썼어요. 처음에는 허허벌판에 이것 하나만 지어서 건너편 마을의 집과 여기를 왔다갔다했지요. 저기 있는 제 책들이 다 여기서 쓴 것들이지요. 전기도 수도도 없이 깜깜한 곳을 왔다갔다 했어요. 밤이면 무섭기도 했어요. 고라니도 자주 왔어요. 그래도 저한테는 글 쓸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어요.”
이 ‘시정’은 독일에도 하나가 더 있다. 남동부 도나우 강가 파사우라는 작은 마을이다. 앞에서 말한 전 교수의 시 스승 라이너 쿤체의 집이 있는 곳이다. 쿤체 시인이 사후에 시인 박물관으로 개조하려고 생각했던 자택 뜰에 귀한 자리를 얻어 한옥 정자를 지었다.
한국에서 장인들이 설계해서 지은 것을 다시 분해해서 배로 실어 날라 현지에서 짜맞추는 ‘대역사’를 거쳤다. 그곳 정자에도 똑같은 ‘시정’ 현판을 걸었다고 했다. 전 교수는 그 과정에 오간 편지와 기록들을 한 권의 책으로도 엮었다.
이윽고 언덕 위 전망대에 이르렀다. 공사용 가건물처럼 철골로 얽어올렸다. 외관은 그리 볼품이 없지만 올라와 보니 그럴듯하다. “여기 찾아오신 분들이 더울 때는 이곳에 올라와서 시원하게 전망도 즐기라고 지어 올린 거예요. 아끼는 제자들 가끔 와서 숨도 고르기도 하고. 일출 때는 여기 풍경이 기가 막혀요.”
땀도 식힐 겸, 이곳에 주저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인생을 배우다’가 첫 에세이집이라구요. 제목처럼 인생에서 배운 지혜랄까 철학 같은 것이 잘 나와 있더군요.
이곳 서원 개관을 기념해서 냈어요. 저는 요즘 제 약력을 써놓고 보면 너무 번듯해서 겁이 나는데, 사실 저는 굉장히 어렵게 공부했어요. 어릴 때 경북 영주에서 35리나 떨어진 산골에서 살았는데, 국민학교 때 다니던 등하교길을 30년이 지나서 차로 한번 가보니 왕복 11.6킬로미터가 되더군요. 비가 와서 외나무 다리가 떠내려 가면 그날 학교도 못 가곤 했어요.
부모님의 삶도 참 파란만장했지요. 아버지는 장손이어서 한학을 증조부한테 배우다가 12세에 학교에 들어가서 2학년 때 결혼을 하고는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고 해요. 집안에서 그래도 너는 장손이니 신학문을 해야 한다고 해서 뒤늦게 서울 휘문중고등학교를 갔어요. 졸업 후엔 일본 와세다 대학에 들어갔는데 2차대전이 났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정치학과에 갔는데 또 6.25가 터졌지요.
아버지가 그때 정치사회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고향에 내려와서 교사로 일하던 중에 5.16 쿠데타가 났어요. ‘군사혁명’ 초반에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정치를 해보려고 하시다가 다시 관뒀어요.
그 사이 어머니도 말도 못하게 고생을 많이 하셨지요. 16세에 결혼하고는 곧장 큰 집안 살림을 꾸려가야 했으니까요. 결혼 18년 만에야 저를 낳았고, 나중에 8년 차 나는 동생이 생겼어요. 저는 국민학교 5학년을 마치고는 서울에서 혼자 살았어요.
-어떻게 그 나이에 혼자 살게 됐지요?
어느날 아버지가 부르더니 “너 서울 가서 공부 안 할래?” 하셔요. 속으로 너무나 놀랐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네” 했어요. 그 다음 날로 아버지가 서울에 데리고 가셨어요. 그때 서울은 제게 지금 미국, 독일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어요. 6시간 동안 통통거리는 기차를 타고 가서 서울에서 6학년부터 혼자 살았지요. 아버지는 고향집으로 내려가서는 제게 생활비를 부쳐주셨어요.
-어린 나이인데 겁이 안 나던가요?
그냥 살았어요. 겁도 모르고.
-원래 어릴 적부터 당찼나 보지요?
아뇨, 순 바보예요.(웃음) 그 뒤에 제가 중 3때 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서울로 왔어요. 병원 있는 데로. 그때 어머니도 수발하느라 고등학교 때 좀 힘들었지요. 그래도 대학은 잘 들어갔어요.
-혼자서도 공부를 잘하셨나 보네요.
아니에요. 그때 일 중에 지금도 안 잊히는 게 있어요. 경기여중 시험을 보고 왔더니 국민학교 담임선생님이 남대문 시장에 데려가서 편한 바지를 사주셨어요. 그때는 체력장을 봐야 했는데, 다음날 달리기 잘하라고 격려해주신 거지요. 그거 입고 열심히 뛴 기억이 나네요.(웃음)
-대학 때 독문학과에 들어간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요?
18,19세 때 뭘 알았겠어요? 그때 집에서 돈을 부쳐주시는데 다른 데는 쓸 줄을 몰라서 당시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족족 샀어요. 혼자 있으니까 책을 참 많이 봤어요. 이것저것 많이 읽었어요.
문학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선명했는데, 국문학은 좀 아는 것인 것 같고, 영문학은 많이들 하는 것 같고, 경기여중고 다닐 때 제2 외국어가 독일어였어요. 또 릴케니 괴테니 이런 독일 작가들에게 매료가 됐지요.
-그때는 서울대에 지방 출신이 많았지요?
그럼요. 가난한 지방 유학생이 많았아요. 캠퍼스가 동숭동 대학로에 있을 때인데, 도서관 계단 밑에 매점이 있었어요. 학생들이 멀건 콩나물국물만 사서 밥만 싸온 도시락이랑 같이 먹곤 했지요.
계단 위에 올라가면 바로 철학과가 있었는데 누가 목청 높여서 플라톤이 어쩌고 하던 시절이었지요. 그 기억 때문에, 처음 제가 독일에 공부하러 갔을 때 딴 사람들은 대학식당 밥이 맛없다고들 했는데 저는 그 친구들 생각이 나서 목이 메었어요.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요?
대학원까지 줄창 6년은 공부를 잘 했는데 그 다음 길이 없어진 거예요. 왜냐하면 유학을 가야 하는데 그때는 박사과정 원서도 함부로 못 냈어요. 서열이 있어서. 유학을 가려면 독일학술교류처 장학생에 선발이 돼야 했어요. 정원이 전국에서 한 명이었어요. 보통은 학과 조교를 하고 나면 시험을 봐서 가곤 했어요.
저희 학년 전체가 20명에 여학생은 저 혼자였는데, 졸업 때 성적이 좋아서 무급 조교 1년을 했어요. 그 다음에 유급 조교가 될 차례였는데, 어떤 남학생이 제대하고 복학을 하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거예요. 갑자기 저는 길이 끊기면서 희망이 사라진 거예요. 그때는 여자들은 ‘논외’였던 시절이었어요.
그 뒤로 한 5년을 그냥 있다가, 이대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학교에 가봤더니, (그때 서울대는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상태여서) 온통 낯선데 독일 유학생 선발 공고가 떡 붙어 있는 거예요. 마감 며칠 전이었는데 지원을 해버렸어요.
다급한 마음에 조교 우선 지원 관례 같은 것도 안중에 없었지요.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제가 되고 학과 조교는 떨어져버린 거예요. 붙었으니 안 갈 수도 없고, 학교에는 (관례를 어긴 셈이니) 얼굴을 내밀 수 없는 상황이 됐지요.
그때는 캠퍼스에 최루탄이 터지고, 학생들은 시국사범으로 잡혀 가고 하던 시절이었어요. 저는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도 참 불편하고 염치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때 또 마침 (대학 졸업하고 결혼 후에도 한동안 없던) 애가 생겼어요.
그래서 처음 독일에 가서는 세 학기만 하고 왔어요. 2개월짜리 아이를 두고 가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때 ‘불경죄’에다 이런저런 사연이 얽혀서 도무지 희망을 갖기 어려웠어요.
석사 끝내고 10년을 낭패 속에서 지내는 동안, 혼자서 있는 책은 다 읽고 번역했어요. 번역서를 출판한다는 개념도 없었어요. 그때는 컴퓨터가 나오기 전이어서 한 번 번역하려면 원고를 타자기로 한 다섯 번은 쳐야 했어요. 손쉽게 교정이 안되니까. 하도 타이핑을 많이 해서 저녁에 젓가락질이 안 될 정도였어요. 아이도 어렸을 때라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때 열심히 읽은 게 결국 힘이 되더군요. 인문학이라는 게 결국은 읽는 힘 같아요. 나중에 독일에 가서 보니, 거기서도 선생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독일 교수처럼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더 정밀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거나 놓치는 것도 꼼꼼하게 볼 수 있으니까요.
그때 번역해놓고도 아직 출판 안 된 게 많아요. 한 60-70권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그때는 공부할 기회만 있으면 어디든 가서 배우려고 했어요.
그러다가 전두환 정부 때 대학을 많이 늘리면서 서울대 대학원에 응시하라는 연락이 왔어요.(전 교수는 서울대에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에 대학이 난립하면서 작은 사립대에 가서 11년간 있다가 1996년 서울대에서 오라고 해서 가게 됐어요.
-2011년에 ‘괴테금메달’을 받아서 화제가 됐지요?
너무나 뜻밖이었어요.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라고 있어요. 금년에 130주년 되는 유서 깊은 학회입니다. 거기서 괴테 연구자들 대상으로 격년제로 주는 상이에요. 100년쯤 됐는데 그때까지 외국인이 받은 일은 거의 없었어요. 나중에 찾아봤더니 동양인으로는 제 앞에 일본인이 한 명 있었고, 제 뒤에 중국인이 한 명 받았어요.
그동안 제가 발표한 논문과 괴테 시를 전부 번역한 것, 관련 저술 낸 것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한 결과였어요. 그때 놀라서 수상 연설에서 “이제 비로소 이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춰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2011년 6월 시상식 때 테렌스 제임스 리드 옥스퍼드대 교수는 축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 교수가 번역한 작품들의 풍부한 양과 폭을 생각하면 그것은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입니다. 놀라서 자문하게 돼요, 한국에서는 하루가 몇 시간인가 하고요.”)
-연구 업적으로 큰 상을 받은 그 해에 ‘서울대 교육자상’도 받으셨지요? 지금도 학생들 사이에서 강의가 인기 높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서 하는 수업이에요. 서울대에 부임한 것이 1996년이었어요. 가자마자 그 다음 학기부터 시작한 ‘독일 명작의 이해’를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연구 학기 말고는 빠지지 않고 매년 했어요.
보통 강의는 똑같은 것을 두 번 하기도 어렵거든요. 하지만 그 수업은 달라요. 제가 사회만 보고 수업은 학생들이 알아서 하니까. 한 학기를 마치고 나면 마치 제가 큰 부자가 된 기분이 들어요. 여기 서원도 그 수업을 들은 제자들을 위해 만든 거예요.
(2011년 서울대 교육자상 수상 감사 연설에서 전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받은 것은 정말 얼마나 많은지요. 한 학기가 지나면 처음에는 그저 ‘학생’이던 한 사람 한 사람이 그야말로 조각처럼 뚜렷해져 있는 것을, 앞으로 우리 사회 이곳저곳에서 한 역할을 다부지게 해갈 든든한 사람들의 모습이 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젊은이들의 그런 놀라운 성장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축복인 것 같습니다… 제가 얼마나 부자인가요.”)
오월 마지막 토요일, 시월 마지막 토요일을 ‘오마토’ ‘시마토’라고 해서 모입니다. 저는 오는 사람들을 다 알지만, 온 사람들끼리는 서로 다 몰라요. 그래도 같이 있다가 밤늦게 제가 잠이 들면 그 사람들끼리 밤새 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그 수업을 통해 너무나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수 있어서 감사하고 황공할 따름이지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누군가 걸출한 인물이 나와서 크게 바꿀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실 어려운 일이고 위험한 일이기도 하잖아요. 저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너무 마모되지 않은 채 세상에 온전히 좀 남아 있으면 그게 바로 세상이 나아지는 길이 아닐까 싶어요. 서원 일도 그래서 시작한 일이에요.
-책에서도 수업을 들은 다른 학과 학생들과의 인연을 많이 언급하셨더군요.
수업에서 사실 저는 별로 하는 게 없어요. 학생들이 읽어온 책을 가지고 진행해요. 그 책이 아주 중요한 것이면, 제가 몇 마디 하고. 아니면 내가 잘 모르는 경우엔 그냥 넘어가기도 하고. 별도의 커리큘럼도 없어요.
학생들에게 “에베레스트 올라갔다 온 사람이 관악산을 못 가겠느냐” 하면서 파우스트를 읽힙니다. 혼자서는 읽기 어려운 작품이어서 조별로 역할을 배정해 한 달 간 읽게 합니다. 다들 즐겁게 읽고 조별로 회의록을 씁니다. 저는 회의록을 보고 거기 나온 질문이나 읽기에 도움 될 말만 조금 거듭니다.
학생들은 독회가 끝나면 거기에 대해 글도 씁니다. 마지막에는 이 서원으로 와서 다같이 몇 십 명 둘러 앉아서 다 읽습니다. 그러고는 조별로 밥 해 먹고 파우스트의 한 장면을 공연합니다. 저기 무대는 그래서 만들어 놓은 거예요. 여기 시정에 와서 시도 한 편 읽고.
그 다음 중요한 독일 작가들을 정해주면 학생들이 내키는 대로 작품을 골라 읽습니다. 책 읽는 즐거움을 일깨워주는 거지요. 무엇보다 읽고 난 후에는 반 쪽이라도 글을 쓰게 합니다. 학생들끼리도 굉장히 가까워집니다. 학기말에는 각자 책을 만듭니다. 얼마나 정성껏 만드는지 몰라요.
전망대에서 내려 오는 길에 ‘괴테 오솔길’이 보였다. 그 길을 따라 시비가 놓여 있다. 노년기 시들이다.
-괴테는 만년 청년이었던 것 같아요.
파우스트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지요. 60년 동안이나 쓰고, 죽기 바로 전 해 여름에 “이제는 다 끝났다”면서 밀랍으로 봉인을 해서 넣었다가, 죽기 바로 전(3월 20일)에 다시 꺼내서 또 고쳤다고 해요.
이제는 여백서원 지붕 안으로 들어와 큰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아까 대문 앞 텃밭에서 따온 찻잎으로 우려 낸 차를 앞에 두고 다시 대화를 이어갔다. 전 교수는 깜박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가서 보따리를 들고 왔다.
서원에는 귀중한 글들이 있다. 내 어머니가 읽으신 책. 반가에서 태어나 학교 문턱에도 못 가셨고,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사시면서도, 책만 보면 일일이 한지에다 필사를 해서 그것이 낱장이 되어 흩어지도록 읽어 다 외우셨던 어머니의 그 간절한 필사본들을 젊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책이 그토록 귀하게 읽혔던 전통을 알려주고 싶다.
또 시 선생님이신 라이너 쿤체 시인의 책들. 내 작은집 팩스로 부쳐주신 수백 통의 가르침이 담긴 편지들, 내 수업 듣는 학생들이 한 학기가 끝날 때면 어김없이 정성껏 만들어내는 책들, 그들이 세상에 나가서 만들어 오는 책들.. (‘인생을 배우다’ 중에서)
여기 온 분은 이걸 꼭 보여드립니다. 어머니가 어릴 때 필사한 책이예요.
-선생님 학구열이 어머니를 빼닮은 건가 보네요.
어휴, 저는 발치도 못 따라갑니다. 어머니는 말도 못하게 고생을 많이 하셨어요. 나이 열여섯에 결혼하시고 큰 살림을 꾸려가야 했지요. 요즘은 책이 흔하디 흔해졌지만, 저희 어머니는 학교 문턱에도 못 갔어요. 그 와중에도 책만 보면 이렇게 죄다 베껴 썼어요. 보세요. 너덜너덜하잖아요. 이렇게 되도록 읽고, 읽은 책은 다 외웠어요. 열두서너 살 때였다고 해요. 배움에 대한 간절함이 얼마나 컸나 몰라요.
두루마리 가사집은 참 많은데 책으로 남은 것은 ‘강릉추월전’ 이것뿐입니다. 고생하면서 사시는 동안 이걸 읽고 외우고 하면서 견뎠던 거지요.
제가 어릴 때 육전(六錢)소설(옛 문고본)도 어머니랑 같이 다 읽곤 했어요. 저는 이런 걸 요즘 젊은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어요. 요즘은 귀한 것을 잘 알아보지 못하고, 그것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런 걸 꼭 보여줍니다.
이건 제 책 서문에도 썼지만, 홀레씨가 제가 남겨 주신 장서 200여 권 중 하나입니다. 1823년본으로 굉장히 귀중한 책입니다. 여기 1819년에 출간된 괴테의 서·동시집도 있어요.
당신 자녀분들도 다 훌륭한데, 이 귀중본을 굳이 제게 남겨준 것은 이 책이 어디로 가야 가장 귀하게 보관되고 읽힐까 생각한 거지요. 여기 ‘세기의 판본’이라 불리는 1854년 파우스트본도 있어요. 사실 이런 게 도서관에 하나 있기만 해도 굉장한 자랑거리로 삼을 만한 희귀본이지요.
이 사진이 홀레씨입니다. 그분을 처음 뵙게 된 게 기차 안이었어요. 6명이 타는 칸이었는데 저와 대각선으로 맞은 편에 앉아계셨지요. 그때 바로 제 옆에 앉은 젊은 사람이 다음 교통 편인 비행기를 놓칠까 봐 굉장히 불안해 해요. 모르는 사람이지만 제가 그곳 상황을 좀 알고 있어서 위로를 했어요.
그 사람이 공항에서 내리고 난 후에 기차가 프랑크푸르트까지 10-15분을 더 가는데 갑자기 이 분이 제게 말을 걸더군요. 프랑크푸르트에 가면 히시그라벤에 한번 가보라고 해요. 그 순간 깜짝 놀랐아요. 거기가 괴테하우스의 주소였거든요. 그렇게 처음 만났어요.
그 다음 괴테 250주년 때 뒤셀도르프에서 다시 뵀는데 사모님이 같이 왔어요. 제가 그때 괴테의 서·동시집에 대해 강연했는데, 끝난 후에 당신 댁에 하룻밤 자고 가라고 해요. 고사를 하고 호텔에 갔더니 과일 바구니를 보내셨더군요. 와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쪽지와 함께.
할 수 없이 갔는데, 그때 제가 관심 있을 만한 책과 기사 들을 꺼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걸 다 읽고 오느라 열하루가 걸렸어요.
-독일에 한국식 정자를 지은 일도 난관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조그만 정자인데도 사연이 얼마나 긴지 몰라요. 천안에서 지어서, 일산에 가서 소독 포장해서 부산에 가서 다시 선적했어요. 레고처럼. 문이 22짝 들어갔는데 보석상자처럼 지었지요.
(전 교수는 독일에 한옥 정자를 짓기로 결심하고 장소를 고민하던 중에 쿤체 시인의 승낙을 얻어 그의 집 뜰에 정자를 짓게 됐다. 전 교수는 이 과정에 오간 편지글과 메모, 기록,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비매품 도서로 제본했다.)
-쿤체 시인은 어떻게 시의 스승으로 삼으시게 됐습니까?
쿤체 시인은 옛 동독 출신입니다. 1960-70년대 국내에서는 금서였던 그의 첫 시집 ‘민감한 길’(1969)과 산문집 ‘참 아름다운 날들’(1976)을 제가 번역했다가 해금 뒤인 1989년에 출간한 것이 인연이었어요. 1994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세계 독문학회에서 첫 대면한 후로 독일시의 스승으로 삼게 됐습니다.
학회 때 그분 시에 대해 발표를 했다가 우연히 그분도 그곳에 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가, “허락도 없이 시를 번역해서 책을 내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오히려 감사하다고 하시더군요. 그 뒤로 팩스로 시를 주고받으며 제 시의 스승이 되셨습니다.
2005년에 한국에 오신 적이 있어요. 그때도 한 단체의 작가포럼 초청은 두 번이나 고사하다가, 제가 “학생들이 선생님 시를 듣고 싶어해요”라고 했더니 자비로 날아와서 낭독회를 하셨어요. 일주일 머물면서 한국에 관한 시도 열두 편 짓고 시집으로도 냈지요.
마침 지난 주에 그분 댁에 갔더니 그 사이에 귀빈이 다녀갔다고 해요. 메르켈 총리가 다녀간 거예요. 여름 휴가차 오전 10시에 와서 오후 4시에 갔다고 하더군요. 6시에 베를린에서 푸틴(러시아 대통령)과 만날 약속이 있다면서 일어났다고 해요. 총리가 휴가 때 조용히 시인의 집에 찾아오다니 놀랍지 않아요?
-이건 뭐지요?
아버지가 직접 옮겨 쓰신 증조부 문집입니다. 제 아버지는 90세까지 에베레스트에 오른 분이세요. 그 해에는 갔다오시더니 “이번엔 덜 올라갔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면서 “무슨 일이 있으면 너네는 어쩌니, 거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할 텐데” 하시더군요. 그때 벌써 담도암 2기말이었어요. 91세 되던 해 1월 5일 6시간 반 수술을 받았는데 결국 돌아가셨어요.
그래도 하시던 일을 다 마무리하고 가셨어요. 이게 그때 남긴 증조부 문집인데, 한학자도 아닌 분이 공부를 해가면서 다 번역을 하셨어요. 옥편 여덟 질(한 질이 스무권)을 옆에 놓고 옮겨 내려가신 거예요. 여기에 ‘울면서 피로 번역했다’고 쓰셨어요.
-왜 그러셨지요?
후손들이 읽게 하기 위한 거였지요. 가령 저만 해도 오래 전 먼 이방의 괴테 책은 줄줄 읽으면서 정작 증조부 글은 못 읽잖아요. 뭔가 이어주시고 싶은 게 있으셨던 거지요.
이것들은 제 수업을 들은 학생들이 만든 ‘나의 책’이에요. 한 학기 끝나면 한 권씩들 만들어 제출했어요. 아이디어들이 기발해요. 저는 학생들 쓴 글에다 감평을 짧게 써서 나눠줍니다.
-오마토, 시마토 모임은 사전 공지를 하나요?
전혀 없어요. 올 사람은 알아서들 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번은 대구에서 밤 11시에 온 사람도 있어요.
-여기서 숙식도 하나 보지요?
침낭이 많이 있어요. 각자 알아서들 합니다. 여긴 자력갱생이 모토예요. 다들 빈손으로는 오지 않아요. 뭐라도 하나 들고 와서 자기들끼리 여기서 먹고, 이야기하다 자다가 합니다. 제가 하는 일은 아침에 국 끓여주는 게 유일합니다.
이곳이 정말 여백 같은 곳이 됐으면 해요. 호흡도 좀 가누고, 둘러앉아서 이야기하려면 하고, 글도 써오면 읽기도 하고, 악기가 있으면 연주도 하고. 각자 마음 가는 대로 하는 거지요. 딱딱하게 프로그램을 짜서 돌리지도 않아요.
이곳에서 생산적인 뭔가를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꼭 그게 아니더라도 와서 쉬고 책도 보고 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어요. 그런 게 결국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 될 테니까요. 그걸 간절히 바랬는데, 다행히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어제도 어떤 분이 오셔서 그냥 계속 책만 읽다가 가셨어요.
-독일 문학을 전공하시면서 번역서를 누구보다 많이 내셨습니다. 누구를 가장 좋아하세요?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살아있는 분으로는 쿤체 시인입니다. 평생 독학을 하다보니 선생에 목말랐는데 저는 뒤늦게 다 만났어요. 학문의 선생님은 49세에 만났고 시의 선생은 55세에 만났어요.
-학문의 스승이라면 누구 말씀인가요?
헨드릭 비루스라고, ‘괴테 서·동시집 연구’를 내신 분입니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자이지요. 제가 그분 책도 번역했고, 에세이집에서도 따로 소개도 했지요.
(한번은 독일의 아주 조그만 시골에서 열린 주말 세미나 모임에 찾아갔다. 내가 관심 있게 읽고 있던 분야에서 독보적인 전문가인 석학이 이끄는 블록 세미나였다. 내가 -나중에 그분의 표현으로- 얼마나 눈을 반짝이며 들었는지, 휴식시간에 그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물으셨다. 마침 세미나 주제로 쓴 글이 있어 그 이야기도 했더니 내일 저녁에 그것 좀 발표해 보라는 것이었다…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밤새 원고를 손질해서 다음 날 저녁 정성껏 발표를 했다. 이번에는 그분이 그야말로 눈을 반짝이며 경청해 주셨다. 끝나고는 아주 내 옆자리로 와 앉으셨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들판으로 함께 걸어나가게 되었는데, 낮이 긴 여름이라 이제 막 어스름이 내리고 첫 별이 뜨고 있었다… 처음 간 바이마르가 그때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중에 내가 쓴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바이마르에서 온 편지’라는 책으로 묶어낼 정도로 나는 기나긴 편지들을 썼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지나가는 소리로 그런데 그 책은 제 스물일곱 번째 책이에요, 했다. 그랬더니 그분이 느닷없이 자기가 키스를 좀 하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다… 장한 아이에게 아버지가 하듯이 그렇게, 내 키의 두 배는 될 법하신 분이 내 머리를 두 손으로 붙잡고 이마 위에다 가볍게 키스를 해주셨다… 사랑과 존경이 담긴 인정이었다… 나는 당시 마흔아홉이었는데, 지구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도는 것 같았다. 그리 오래 찾던 선생님을, 학문의 스승을 이제야 만난 것이었다. 그동안은 노상 혼자 공부하다시피 지내다 보니 평생 스승을 찾아 헤매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세상의 정말 중요한 일들은 바로 외로움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런 이치를 젊었을 때는 몰랐다. 그분, 평생 찾아온 스승인 헨드릭 비루스 교수를 만난 후로 나는 정말이지 열심히 공부했다.)
-독일 문학과 문인들을 오래 공부하고 접하셨는데 어떤 특징이 있나요?
좋은 의미일 수도 나쁜 의미일 수도 있는데 생각이 많이 들어가 있어요. 물론 저는 좋은 의미로 말을 하는 겁니다. 흔히 사변적이라고들 하지요. 독일을 보면 제일 부러운 게 있어요. 어느 나라나 다 고급 문화, 저급 문화가 있잖아요.
독일도 둘 사이 간극이 크긴 한데, 고급 문화를 돌보는 사람들이 뚜렷하게 있는 것 같아요. 이른바 ‘교양시민층’입니다. 독일인 자신들도 요즘은 그 시민층이 사라진다고 개탄들을 합니다만, 그래도 우리가 보면 여전히 부럽지요.
가령 홀레 씨 같은 경우만 해도 그저 작은 개인 사업을 하는 분인데, 그렇게나 성심껏 문학을 하는 사람을 돕습니다. 저 같은 외국 학자도 그렇게 자상하게 보살피니 다른 사람은 어떻겠어요.
그분이 괴테학회 재정감사도 맡아서 했는데, 저는 그저 가끔씩 돈을 기부하는 역할인가 싶었어요. 알고 보니 그 정도가 아니라, 우선 문인들이 계산에 능하지 않은데 그런 재정회계 일을 다 해주고, 사업가들과 연결해서 후원금도 받아주는 일을 해요. 끊임없이 책도 읽고. 그렇게 문화를 지켜가는 층이 상당히 두꺼운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이 사회의 중심이 되는데 그게 부러운 거지요.
또 늘 제가 하는 얘긴데, 독일은 위아래가 안 보여요. 독일에 있다가 미국 가면 계급사회라는 첫인상을 받는데 독일은 안 그래요. 돈 많은 부자도 분명히 있을 텐데 겉으로 별로 안 보여요.
쿤체 선생의 일화 중에 기가 막힌 게 있어요. 그 집에는 매년 좋은 와인이 와요. 한번은 낭독회를 마치고 옆 사람이랑 한창 얘기하는데, 무슨 일 하느냐고 물었더니 농사를 한다고 하더래요. “내가 망치는 있는데 모루가 없다. 그걸 구할 길 없느냐”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더니, 그때가 여름인데도 큼지막한 모루를 짊어지고 쿤체 집에 찾아왔더래요. 알고 봤더니 그분이 ‘왕’(제후)이었어요.
독일에는 아직도 지방에 그런 왕들이 있어요. 왕이란 사람이 그 무거운 걸 지고 시인의 집에 온 거예요.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넓은 영지에서 나는 포도로 만든 포도주를 매년 보내준다고 해요. 아까 메르켈 총리도 그렇잖아요. 지도자가 그 귀한 휴가를 이용해 시인 집에 찾아올 생각을 한다는 게 상상이 가요?
메르켈 총리의 남편이 화학 교수인데, 좋은 시를 발견하고는 작가가 누군지 구글로 찾아보다가 쿤체 시인인 걸 알고 둘이서 휴가에 그 집에 왔다고 해요. 그것도 떠들썩하지 않게 조용히. 다녀가는 동안에도 동네 사람들은 총리가 다녀갔는지 몰랐다고 해요. 그처럼 소리 없이 문화를 지켜가고 남을 배려하는 것도 참 부러워요.
-독일에 있다 온 분들은 그곳 독서 문화를 많이 얘기하더요.
많은 사람들이 차만 타면 책을 열어요. 예전에 동독은 더 심해서 ‘독서국’이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였지요. 별다른 오락거리도 없고 하니 더 그랬던 거지요. 독일은 TV가 참 재미가 없어요.
-우리와는 대조적이군요.
우리는 TV가 너무 재미있어서 국민이 그것만 들여다봐서 걱정이지요. 소비도 너무 조장하는 것 같고. 사람들이 이제는TV 좀 덜 보고, 책도 좀 보고 했으면 좋겠어요. 똑같은 TV 프로그램을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조종되기가 쉬운 건가요. 이거 좋다고 사라고 하면 다들 사고 그러지 않나요. 뭘 하든 한쪽으로 쏠리기 쉽잖아요. 결코 건강한 게 아니지요.
-선생님께서 이런 서원을 짓고, 학생들 문집도 내게 하는 것도 다 ‘교양시민 문화’를 위한 밑거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게 독일에서는 그전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누적된 거지요. 우리는 상대적으로 희박하지만 이제라도 해야지요.
저는 젊은 아이들이 춤추고 노래만 하고 영어만 하지 말고, 일도 좀 하고 풀도 좀 뽑고 땀을 흘렸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여기 오면 다들 일을 합니다. 얼마간 노동의 기쁨도 알고 땀의 맛도 알고 그래야 개인이 잘 서고 그래야 사회가 잘 될 것 같아요.
각자 맡은 일이 힘들지만 그래도 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일에도 보람을 느끼고, 또 남의 일도 도와주면 좋겠어요. 자꾸 남들 따라가려고 하고, 남을 누르려고 들면 어떻게 되겠어요. 남들은 불특정 다수이고 나는 혼자인데 어떻게 감당이 되겠어요. 따라가려면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고, 점점 스스로 불행해질 수밖에 없지요.
나 나름의 삶 안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것, 그런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는 시간이 있어야지요. 지금도 저 어린 친구들이 와서 열심히 꽃도 심고 해요. 나중에 와서 내가 심고 키운 것이 자란 걸 보고 하면 기분 좋거든요.
-“20대에 일찍부터 내가 하는 대로 살아보겠다, 그래도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책에 쓰셨더군요.
남에게 보여주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냥 별 잔 재주, 잔 계산 없이 살아도 잘 살아진다는 것을 내가 해 보이고 싶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고집이었을 거예요.
힘든 시절에도 그랬어요. ‘이 어둠이 뭔지’ 알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냥 막 읽었어요. 다른 건 모르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책을 읽는 것이니까. 거기서 뭔가를 찾아보려고 했던 것 같아요.
사실은 그 책을 쓴 사람들도 알고 보니 다들 숱한 고생 끝에 그 높이에 이르렀더군요. 그래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정말 다들 힘든 인생을 그렇게 감내하고 살았구나, 그런 생각을 볼 수 있었어요.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정말 얼마나 부자인가 싶었어요. 책을 쓴 사람과 그것을 읽는 수많은 사람들과 엄청난 유대감이 느껴지거든요. 그러니 힘든 것도 좀 의연하게 감당하게 되고.
글을 읽을 줄 알아서, 그 많은 것들을 읽을 수 있었고, 그럼으로써 그 많은 좋은 사람들을 직간접으로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나 감사했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젊은날에 가졌던 약간의 불만 따위는 허황하다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우뚝우뚝 서서 같이 가야 잘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삶에 자부심이 있어야 남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자기 본업이 잘 안 되는데 딴 걸로 메우려고 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흔히 남을 도와준다면 자선사업이나 고아원 같은 거창한 일을 생각하는데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중에 떼돈 모아 희사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일상 생활 중에서 한 사람한테 말 한 마디라도 나쁘지 않게 하고 잘 대하는 것만 해도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범위 아닐까 싶어요.
-시도 쓰셨지요? 독일어로 시가 터져나온 게 40세 전후라고 쓰셨던데.
나오는 대로 쓸 뿐이지요. 예전에 문단에도 잠깐 나가본 적이 있는데 저는 안 되겠더군요. 굉장히 독보적인 재능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문단 취향은 아닌 것 같고. 그래도 시를 쓰면서 살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명시를 써서 이름을 내는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 저는 글 쓰는 시간은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글이란 장사하기 위해 눈물, 콧물 묻히기에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어서, 그냥 수양하는 정도로 생각하고 글을 씁니다. 시집은 독일에서 나온 것도 있고 한국 것도 있고 한데, 처음에 모르는 출판사에서 조금 내다가 그 다음부터는 내지 않고 있어요. 관심 있는 제자들 주려고 묶어놓은 것들은 있어요.
사실 책을 낼 때 출판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잘 다듬어지는 부분도 있지만 창작 부분은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도 있거든요. 인쇄소에 부탁해서 책을 내면서 일반용으로 출판하지 않은 예쁜 책들이 많아요.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결국 궁극적인 것은 학문이든 시든 예술가든 마찬가지일 텐데, 시인도 바른 삶의 장과 직결되는 것 같아요. 물론 시인은 섬세한 사람이고 여러가지 파행적인 실험을 시도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또한 주변부의 상황 요인도 있겠지만 근본에서는 바른 삶에 대한 생각과 닿아있는 것 같아요.
그런 심지가 없으면 어떻게 세상 만물에 애정이 생길 수 있겠어요. 바른 삶에 대한 뿌리가 없으면 그건 질투로 갈 수도 있고 질환으로 갈 수도 있지요.
바른 삶에 대한 지향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이 그만큼 유난스러워서, 그 사랑을 어떻게든 좀 표현을 해보려는 사람이 시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만큼의 자격은 안 되는 것 같고, 그냥 조금이라도 시를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입니다.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높은 산’ 비유를 자주 하는데, 올라갈 때 어느 길로 가느냐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산의 발치에서는 사람들도 바글바글하고 외롭지도 않고 좋지요. 중턱쯤 올라가면 고요하기도 하지만, 이따금씩 오가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지. 정상쯤 올라가면 모든 사람이 다 반갑습니다. 다들 나름의 고생을 하고 올라왔을 테니까 그런 거지요.
학문이든 예술이든 사실 인류가 사랑 이상의 복음을 찾은 것은 없지 않나 싶어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생명에 대한 사랑이 기반이 되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갈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요즘 인문학에 대한 관심들이 많은데, 대중 강연도 하시나요?
저도 가끔씩 강연 같은 데 불려갑니다만 감사한 마음으로 성심껏 얘기합니다. 똑같은 시간에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면 감사할 일이지요. 그분들이 사실 술 마시고 다른 것 할 시간일 수도 있잖아요. 어찌됐건 목적이 무엇이건 누군가가 그걸 듣겠다는 것은 너무 소중해서 성심껏 가서 얘기합니다. 요번에 귀국한 날 그냥 2시쯤 도착해서 6시반부터 10시까지 했어요.
-어떤 자리였지요?
경영인 역사포럼이라는 덴데 오래전 약속이라 도착하자마자 아예 강연 열리는 호텔에 방 빌려 2시간 누웠다가 강연하고 거기서 자고 내려왔어요.
-강연 주제는?
거기서 정해줬어요. 파우스트 읽는 법이라고.
-간략히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하하, 2시간짜리 강연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가를 상세히 설명했어요. 원래 파우스트 이야기가 오래 전 기독교권의 권선징악을 담은 나쁜 설화에서 나온 거거든요. 욕심이 많아 영혼까지 판 나쁜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가지고, 괴테가 “멈춰라 순간이여, 너 참 아름답구나”라고 할 때까지 가는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 사이의 계약으로 바꿨어요. 그럼으로써 얼마나 큰 이야기의 폭이 생겨날 수 있었나 하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그래서 육십 년 동안 걸려 쓴 거지요.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는 구절이에요. 그것 한 줄만 알아도 사실 파우스트 다 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걸 극단적으로 달리 번역하면 ‘인간은 목표가 있는 한 길을 잃는다’ 이렇게도 번역할 수가 있지요. 그 말은 결국 어딘가 갈 곳이 있는데, 즉 마음 속에 어떤 솟구침이 있는데, 그래서 바로 그 솟구침 때문에 길을 잃는다는 뜻이지요. 지향점이 있기 때문에 헤맨다는 거지요.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요. 지금 내가 방황하는 이 모든 것이 결국 내가 갈 곳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잖아요. 이 한 줄로 요약이 되는 걸 가지고 1만2111행이라는 정교함의 극치에 달하는 시를 만들었거든요.
복숭아로 비유를 들자면 가운데 박힌 씨앗만 먹어도 되겠지만 굳이 그 숱한 이야기를 통해 시고 단 과육을 먹는 것이 바로 문학 작품이거든요. 그러고 나서 스물한 시간짜리 파우스트 공연 장면을 보여드립니다.
그 장시간 공연이 실제로 역사적으로 딱 한 번 있었어요. 1년 하고 2개월 쉬고 4개월 또 했는데. 대단하죠. 그런 장면들을 보여드린 후에 이 단순한 권선징악의 설화를 어떻게 근대인의 드라마로 만들었는가를 설명하지요. 말이 그렇지, 공연을 하는 사람도 그렇고 보는 관람객도 대단하지 않아요?
그리고 어떻게 그 압축적인 모순 어법, 즉 ‘목표가 있는 한 길을 잃는다’는 말이 얼마나 큰 뜻인가, 계속 실수하고 실패하는 그런 얘기들인데도 거의 3000년을 넘나드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그것도 작가가 60여 년에 걸쳐 썼다(물론 매일은 아니고 집중적으로 네 시기에 걸쳐 썼지만), 요즘 온갖 명품들 사려고 목을 매는데 기왕이면 정신적인 것도 명품을 읽으면 어떻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바쁜 생활 중에 마음의 허전함을 채울 것을 찾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분을 볼 때마다 일(노동)을 해보라고 해요. 요즘 사람들이 운동(헬스)의 중요성은 다들 인식해서 신경을 씁니다.하지만 돈을 주고 운동을 해야 하는 줄 압니다. 그게 아니고 어디서든 그냥 일을 하면 되는 거예요.
현대의 많은 문제가 노동과 유리되면서 발생하는 것 같아요.예전에는 농사를 지으면 씨를 뿌려서 그것이 나서 그 전모를 다 보고 내가 수확을 해서 기쁘기도 하고 그랬는데, 요즘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바라보는 시력이 사라져 버린 것 같아요.
우선 일이라는 것이 세상과 나를 연결시켜줍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친구들이 계속 이곳을 돌보고 토마토 지주도 세워주고 풀도 뽑고는 너무들 좋아해요. 저 꼬마 친구도 여기 오면 이전에 자기가 심은 국화가 잘 자랐나 보곤 합니다.
애들도 그냥 공부만 하라고 하지 말고, 어떤 일을 맡겨 보세요. 그 일 하나는 그 아이가 없으면 구멍이 나는 그런 일을 맡겨보세요. 그런 게 하나 있으면 얼마나 자부심이 생기는지 몰라요. ’나 없으면 우리 집이 안 되지’ 이런 책임감을 가지게 됩니다.
직장에서도 자기가 존재할 자리가 있고 그 가치가 인정 받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노동이라는 게 꼭 곡괭이 들고 그러는 게 아니거든요. 일이야말로 세상과 나를 붙여주는 것 같아요.
“아, 똘똘이가 있으니까 쿠션도 의자도 다 똑바로 놓여 있구나” 하면서 서로 즐거워 하는 거지요. 다른 사람들도 기분이 좋아지고 나도 그 사회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거지요. 꼭 어디 가서 거창한 노력 봉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예요. 물론 그런 것도 가면 좋지만, 그냥 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맡아서 하면 되는 거예요.
-세상이 점점 자동화하고 인공지능 같은 것도 발달하면서 새로운 차원의 인간 소외를 걱정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점점 불필요해질 텐데 어떻게든 자기 자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다들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것에만 혈안인데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해야겠지만, 어딘가에 자기 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삶에 사람을 밀착시키는 것이거든요.
릴케가 말하는 것 중에 ‘예술 사물(Kunst-Dingen)’이라는 개념이 있어요. 우리가 사물들을 너무 아무렇게나 휙휙 내버리고 살지는 않나 하는 거지요. 그럴 경우에는 결국 우리 존재도 다 그렇게 쓰레기처럼 되고 만다는 얘기입니다.
많은 물건이 아니어도 볼펜 하나를 볼 때에도 ‘아, 이건 내가 예전에 이걸로 뭔가를 썼었지’ 혹은 ‘어떤 친구가 준 거지’ 혹은 창문 하나를 볼 때라도 ‘아 내가 저 창가에서 언젠가 어떤 좋은 생각을 했지’ 이렇게 추억을 묻히고 가치를 부여할 때 그 사물이 다시금 우리 자신을 구원한다는 거예요. 그게 예술 사물 개념입니다.
꼭 무슨 값비싼 예술품이 아니어도, 우리가 물건 하나하나, 다른 무엇 하나라도 귀하게 바라보고 귀하게 생각할 때 그것은 얼마든지 훌륭한 예술 사물이 될 수 있습니다.
“꼭 해야 되는 일이다 싶으면 힘에 넘치는 일이어도 하곤 한다. 늘 두렵다. 이것저것 하며 사는 걸 보고 힘들지 않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힘들다. 힘든 정도가 아니고 가끔씩은 정말로 죽을 것 같다. 그러나 힘들어도 하면 한 가지 일은 되는 것이고 못 하면 그 하나도 안 된다. 다음 일은 더더욱 안 되고. 몸이건 머리건 움질일 수 있는 한 움직인다 생각하며 살고 있다. 마음이야 더더욱 그러해야 하리라. 이제는 조금씩 손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하는 시간, 좀 더 전하고, 좀 더 나누며 살고 싶다.” (전영애, 2015년 5월 3일 메모 중에서)
◆전영애
서울대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독일 튀빙엔대학과 칼대학에서 수학했다. 1996년부터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있다. 2008~2013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을 겸임했다.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가 주는 ‘괴테 금메달’을 수상했다. 같은 해 서울대 교육자상을 받았다. 서울대에서 20여 년 동안 교양 과목으로 ‘독일 명작의 이해’를 강의했다. 수업을 통해 연을 맺은 제자들은 졸업 후에도 오마토(5월 마지막주 토요일)와 시마토(10월)란 모임으로 만난다.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 ‘괴테와 발라데 ‘서·동 시집 연구’(공저) ‘독일의 현대문학: 분단과 통일의 성찰’ 등 많은 연구서를 국내와 독일에서 펴냈다. 시집으로 ‘카프카, 나의 카프카’와 독일어로 쓴 ‘Regenbogen für Franz Kafka(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무지개)’가 있다. 번역서로 ‘괴테 시 전집’ ‘서-동 시집’ ‘데미안’ ‘나누어진 하늘’ ‘보리수의 밤’ 등 60여 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