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의 북스토리] 해를 주지 말아라

조선비즈
  • 김대식 KAIST 전기 전자과 교수
    입력 2015.09.19 04:00

    내 배를 날카로운 칼로 자르고 내장과 신장을 손으로 만진다. 톱으로 두개골을 열고 뇌를 파헤친다. 빨간 장미를 빨간 장미로 보게 하고, 나의 기억, 감정, 자아, 나의 모든 것의 본질인 뇌를 도려낸다. 싸구려 할리우드 호러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매일마다 이 세상 모든 수술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의사란 어떤 사람들일까. 평생 안 봐도 된다면 가장 좋겠지만, 봐야 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밖에 없는 의사들. 하얀 가운을 입은 지상의 신들. 다 큰 나를 다시 어린아이로 만들어버리는 그들. 강하고 냉정하기 짝이 없던 악덕 정치가의 눈에 눈물을 흐르게 하고, 언젠간 상처와 병으로 죽어갈 우리에게 마지막 희망이 될 의사들. 그들은 과연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위해 사는가.

    헨리 마르시(Henry Marsh)는 영국 최고의 신경외과 의사 중 한 명이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대영 제국 데임'(Commander of the British Empire, CBE) 작위를 수여 받았고, 2004년 영국 TV 최고 방송상을 탄 BBC 다큐멘터리 '그들의 손 안에 너의 목숨'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올해 출간한 책 '해를 주지 말아라'(Do no harm)의 첫 문장은 “나는 자주 뇌를 잘라야만 한다. 정말 하기 싫은 짓이다”로 시작한다.

    수많은 예능프로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의사들.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겠지만 하찮은 농담과 썰을 풀어놓는 그들에게 나의 생명을 맡기고 싶을지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마르시는 다르다. 뇌종양을 도려내기 위해 뇌를 파괴해야 하고, 잘못 건드린 미세혈관 하나가 건장하던 남자를 평생 혼수상태에 빠지게 할 수 있는 뇌수술. 마르시는 본인의 실수와 경험에 솔직하다. 그가 자주 하는 강연의 제목이 '나의 가장 큰 실수들'이니 말이다.

    환자와 가족에겐 생사가 걸린 일이겠지만, 도려내기 '어려운' 종양일수록 흥미진진해 하는 신경외과 의사들. '뇌'라는 신비의 기계를 마치 고깃덩어리 같이 도려내고 잘라내는 그지만, 그는 자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안다. 21세기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의술이지만, 의사의 첫 임무는 바로 히포크라테스가 요구하던 “해를 주지 말아라”(primum non nocere)라는 사실을 잘 알기에, 마르시는 언제든지 무리한 수술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권장한다.

    지적인 호기심보다 환자에 대한 배려와 연민. 자신의 죽음 역시 언젠가는 다른 누군가의 연민과 배려에 의존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마르시의 글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손을 놓을 수 없다.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밤을 새워 끝까지 읽었던 책이 바로 마르시의 “해를 주지 말아라”다.


    Henry Marsh
    “Do no harm”
    Thomas Dunne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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