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간판급 대기업들이 최근 실적 악화로 신음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고 국내 경기도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난 5년간 매년 평균 18%씩 성장한 토종 중소기업이 있다. 습식(濕式) 면도기 전문기업 도루코이다.

내년 창립 60주년을 맞는 도루코는 올해도 지난해보다 16% 증가한 2256억원의 매출을 기록할 전망이다. 매출의 70%는 해외에서 올린다. 이란 등 중동 지역에서는 도루코가 습식 면도기 시장 점유율이 50%를 넘는다. 프랑스의 오샹·까르푸, 미국 CVS·코스트코 등 유럽과 미국 PL(Private Label·유통업체 상표 부착 판매) 시장에서도 도루코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면도기 전문회사 도루코의 백학기 대표가 22일 서울 서초동 본사에서 올해 세계 최초로 출시한 7중날 면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혁신적인 제품으로 세계 면도기 시장을 이끌겠다”고 말했다.

지난 1일 대표이사에 오른 백학기(52) 사장은 "매출의 15~20%를 R&D(연구·개발)에 투자해 우리만의 기술과 품질력을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백 대표는 금오공고 금속공업과와 대림공업전문대학 공업재료과를 졸업하고 1988년 도루코에 입사했다. 기술과에서 근무하다 기술연구소 부소장, 용인공장 생산기술팀 총괄 등을 지낸 '기술통'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면도기 기술로 세계 최고가 되자'라고 생각하며 매진했는데, 다행히 회사와 잘 맞아떨어져 함께 성장해 왔다"고 말했다.

도루코는 1955년 지퍼와 칼을 만드는 '동양경금속주식회사'로 출발했다. 이후 생산품을 면도기와 칼로 전문화했다. '도루코'로 사명(社名)을 바꾼 건 1990년. 도루코는 1980년대 후반 질레트쉬크 등 외국 유명 브랜드의 면도기가 국내시장으로 대량 수입돼 들어오며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때까지 도루코는 상대적으로 품질이 떨어지는 '일회용 면도기' 이미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회사가 어려움에 빠지자 도루코는 기술연구소를 설립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기술과 품질에서 최고가 되지 않으면 위기를 이겨낼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

당시 연구원으로 합류했던 백 대표는 "작은 면도기에도 굉장한 첨단 기술이 들어 있다"며 "반도체 공정처럼 나노(10억분의 1의 극미세 가공 기술) 수준의 가공 기술이 없으면 사람들이 '너무 위험하다'거나 거꾸로 '너무 둔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2001년 기술연구소 부소장을 맡아 6년 동안 도루코만의 독자 기술 개발을 이끌었다. 2007년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휘어지는 절곡날 6개를 면도기 머리 부분에 넣은 '6중날 면도기'이다. 세계 최초였다.

사람의 수염은 약해 보이지만 같은 굵기의 '구리선'만큼 강도가 세다고 한다. 면도날은 정밀하면서도 강해야 오래 쓸 수 있고 면도를 하는 사람이 '부드럽다'는 느낌을 갖는다. 도루코는 특수 스테인리스강 재질의 날을 깎아내지 않고 연마용 숫돌로 5만~6만번 두들기듯 문질러 만든다. 이렇게 하면 쇠의 성질이 치밀하고 단단하게 변해 내구성이 높아지고 수염도 한층 깔끔하게 자를 수 있다. 여기에다 다이아몬드와 비슷한 탄소계 신소재인 'DLC'(Diamond Like Carbon)를 크롬과 합성해 나노기술로 면도날에 매우 얇게 코팅하며 강도를 더 높였다.

백 대표는 "강한 쇠는 잘 부러지기 때문에 휘어지는 날을 만드는 게 쉽지 않다"며 "휘어지는 6중날 면도기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것은 우리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임을 말해준다"고 했다.

도루코는 올해 세계 최초로 7중날 면도기까지 선보였다. 백 대표는 "질레트는 아직 휘어지지 않는 일반 5중날까지만 내놓고 있고, 쉬크는 우리를 따라 휘어지는 날을 내놓았지만 아직 6중날 제품뿐"이라고 말했다.

기술과 품질이 받쳐주자 세계시장에서도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이란 등 중동 국가에서 시장을 석권한 것은 수염이 많고 억센 사람들이 많아 특히 품질에 예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동뿐 아니라 동남아와 아프리카, 남미 등 신흥시장에서 도루코 매출은 꾸준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도루코는 해외시장 개척을 확대하기 위해 미국·중국·영국 등 6개국에 법인을 세웠다.

백 대표는 "유명 업체에 비해 브랜드 파워가 떨어지다 보니 미국과 유럽 등 선진 시장에서 아직 점유율이 미미한 편"이라며 "앞으로 마케팅 활동을 강화하고 온라인몰을 공략해 2020년 매출 1조원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