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큰손들]⑦ 화려한 인맥 가졌지만 국제그룹 해체 유탄 맞았던 김종호

입력 2014.12.14 06:18

1980년대 초 명동 사채 시장의 큰손으로 불리던 김종호 세창물산 회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부가 10년째 사채 시장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면서 사채 시장 규모가 많이 줄어든 탓이었다. 도자기와 완구류 등을 제작하던 세창물산을 운영하고 있던 김 회장이었으나, 그의 주 무대는 사채업이었다.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 비단 김 회장만은 아니었다. 김 회장과 같이 큰손으로 불리던 ‘현금왕’ 단사천, ‘백할머니’ 백희엽, ‘광화문 곰’ 고성일씨 등도 정부 단속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도 김 회장은 유독 애를 먹었다고 전해진다. 백할머니 백 여사는 1960년대 말부터 주식투자를 주로 해 상대적으로 단속에 따른 피해가 적었다. 현금왕 단씨와 광화문 곰 고씨는 일찍부터 부동산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 회장에게도 마침내 기회가 찾아왔다. 1982년 정부가 현재의 제2금융권이라 볼 수 있는 단자회사(短資會社, 종합금융사) 설립을 자유화한 것이다. 사채 시장이 급격히 위축된 탓에 급전이 필요한 개인이나 기업들이 돈을 빌릴 수 있는 창구가 없어지며 여기저기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자 정부가 새로 내놓은 대책이었다.

김 회장은 즉각 움직였다. 먼저 호형호제(好兄好弟)하는 사이었던 현금왕 단씨와 타워호텔의 남상옥 사장을 찾았다. 이들로부터 일정 금액의 투자금을 받아낸 김씨는 신한투자금융을 설립했다. 명동의 사채업자로 불리던 김 회장이 금융회사의 수장으로 변신한 순간이었다.

정주영ㆍ이동찬과도 친분…소유 골프장에 박정희 전 대통령 자주 와

1918년생으로 송도고등학교를 졸업한 김종호 회장은 개성 출신이다. 1947년 남한으로 건너온 그는 명동에 둥지를 트고 본격적으로 사채업에 뛰어들었다. 김 회장이 단사천 전 해성그룹 회장과 안면을 튼 것도 이즈음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이 사채업자로 활동하면서 정확히 얼만큼의 돈을 굴렸는지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가 수천억원의 현금을 주물렀다는 게 당시 주변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김 회장은 인맥 쌓기에도 능통했다. 김 회장은 주로 골프를 통해 유명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그가 만들었던 ‘신록회’라는 골프모임에는 단 회장을 비롯해 당시 이동찬 삼경물산 사장(코오롱 그룹 창업주), 최주호 계성제지공업 사장(훗날 우성그룹 회장), 우제봉씨(훗날 대구CC 설립자) 등이 회원으로 있었다. 김 회장은 1966년 신록회 회원들과 함께 고양시 덕양구에 뉴코리아골프장을 건설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이 골프장을 통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도 친분을 쌓았다. 뉴코리아골프장의 초대 주주 중 한명이었던 우씨는 본인 지분을 박용학 한일제분 사장(훗날 대농 회장)에게 매각했고, 박 사장은 다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게 지분을 양도했다. 이후 뉴코리아골프장은 한동안 김종호ㆍ정주영ㆍ이동찬ㆍ단사천ㆍ최주호 5인 체제로 운영됐다.

뉴코리아골프장은 김 회장과 정권 실세들의 연결 창구로도 활용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뉴코리아골프장이 개장할 당시부터 관심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이 뉴코리아골프장에 자주 나와 골프를 즐기고 막걸리를 마셨다고 한다. 김 회장이 대통령과 함께 운동을 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당시 그의 주변에서는 김 회장이 정권 실세들과도 잘 알고 지낸다는 얘기다 돌았다.

국제그룹 해체과정에서 유탄

김 회장은 그러나 1980년대 국제그룹 해체과정에서 이런저런 유탄을 맞으면서 만년에 힘든 길을 걸었다.

김 회장의 장남 덕영씨는 지금은 사라진 국제그룹 양정모 회장의 사위다. 덕영씨는 양 회장의 다섯째 사위였음에도, 1980년대 재계 서열 7위였던 국제그룹에서 부회장까지 지낼 만큼 양 회장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유난히 좋았을 것만 같던 두 집안의 관계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국제그룹은 1985년 부도후 해체됐다. 당시 양 회장은 사돈인 김 회장에게 신한투자금융 주식 124만주를 건네줬다. 양 회장은 국제상사를 통해 신한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었다.
한 데 이 주식에 대해 양 회장은 ‘잠시 맡겨 놓은 것’이라고 했고, 김 회장은 (양 회장이 김회장에게) 증여한 것이라고 맞섰다. 결국 이 문제를 두고 두 집안은 법정공방을 벌였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1998년 2월 김 회장은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 위반(횡령)죄가 적용돼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게다가 사채업자에서 금융인으로 탈바꿈시켜줬던 신한투자금융은 설립 6년 만에 1600억원까지 자산을 불렸지만 역시 국제그룹과 관련된 송사에 휘말렸다.

국제그룹이 도산할 당시 국제그룹의 주거래은행이었던 제일은행과 정부는 신한투자금융이 사실상 양 회장의 재산이라고 판단해, 회사를 매각해버렸다. 당시 정부는 신한투자금융의 대주주가 국제그룹의 부회장이라는 점과 신한투자금융이 국제그룹에 대출한 금액이 회사 총 대출액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들어 김 회장 부자가 보유하고 있던 신한투자금융 주식 130만주를 제일은행에 양도하도록 했다.

1988년 정권이 바뀌자 김 회장은 회사를 되찾겠다며 법정 소송을 냈고, 2년 뒤 법원은 1심에서 제일은행은 신한투자금융을 원소유주인 김 회장에게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전두환 정권 때 사실상 강제 정리되며 김 회장이 피해를 봤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었다. 이후 항소심에서도 법원은 제일은행에 신한투자금융의 지분을 김 회장에게 돌려주라고 다시 판결했다.

김 회장은 회사를 되찾자 일각에서 제기되는 경영권 협상설에 대해 일축하며 자신이 회사 회장에 취임해 경영할 뜻을 밝히기도 했다. 1995년 1월 김 회장은 과거 제일은행에 넘겼던 주식 130만주를 인수하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당시 신한투자금융의 자산은 2조 5000억원 수준으로, 제일은행이 김 회장으로부터 주식을 매수했을 당시보다 16배 가까이 성장한 상태였다.

다시 한 번 재기를 꿈꾸던 김 회장이었으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IMF 경제위기라는 사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1998년 1월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은 1차 폐쇄대상 종금사를 발표했는데 신한투자금융(당시 회사명은 신한종금)도 명단에 포함됐다. 국내 사채 시장의 1세대 큰손으로 불리며 금융인으로서 재기를 꿈꾸던 김 회장은 2002년 4월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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