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큰손들]⑥ 무일푼으로 증권사 회장 된 '백한바퀴' 김형진

조선비즈
  • 이병희 기자
    입력 2014.11.29 17:17

    “이 시간 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 이루어진다” 1993년 8월 12일 김영삼 대통령이 금융실명제 긴급 명령을 발표하자 명동 사채시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망했다”는 푸념이 명동 사채 시장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금융실명제가 시행되기 이전까지 출처를 밝히기 어려운 자금은 가명계좌나 차명계좌,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로 축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 중에서는 도저히 실명 전환이 어려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남의 이름으로 숨겨둔 자금을 실명 전환할 수 있는 기간을 2개월로 못박았다.

    이때백한바퀴’ 김형진이 움직였다. 백한바퀴는 홍승기업 대표였던 김씨가 하루에 명동 백 한 바퀴를 돈다고 해서 주변에서 붙여준 별명이었다. 김 대표(훗날 세종증권 회장)는 명동 사채 시장에서 발품을 팔아가며 채권을 배웠다.

    김 대표는 숨어 있던 돈을 현금으로 꺼내주는 대가로 수수료 5%를 받았다. 은행과 증권사를 이용해 200억원을 주인에게 찾아주고 받은 돈은 10억원이었다. 투자 실패로 ‘알거지’가 됐던 그가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하루에 명동 백 한 바퀴 돌아

    그는 명동 사채시장에서 잔뼈가 굵었다. ‘채권의 귀재’로도 불렸던 김씨는 1973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서사 사무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후 별정직 공무원으로 등기소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훗날 김씨는 이때부터 채권을 사고파는 유통과정에서 돈이 어떻게 생기는지 배웠다고 했다.

    1980년대 초 당시 정부는 국민주택사업을 위해 국민주택채권을 발행했다. 아파트나 주택에 입주할 때 이 채권을 일정 수량 매입한 필증을 첨부해야 등기할 수 있도록 했던 것. 그즈음 김씨는 부도 위기에 몰린 회사에 대출을 주선한 일을 계기로 채권 중개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국민주택채권이 만기가 긴데다 시중 금리보다 이자율도 낮은 탓에 개인들이 채권을 할인해서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노렸다. 김씨는 시중금리보다 더 큰 폭으로 할인해 채권을 매입했는데 여기서 돈이 불어났다.

    한국전기통신공사가 발행했던 전신전화채권 투자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이문을 남겼다. 중간소개업자인 이른바 ‘나까마’에게 만 원짜리 지폐 200~300장을 쥐여주고, 골목을 누비며 채권을 사오게 했다. 이렇게 모인 수 천장의 전신전화 채권을 김씨는 증권회사에 납품했다.

    그는 돈이 궁한 회사에 찾아가서 “내가 두세달 안에 회사채를 팔아주지 못한다면, 채권 발행금액의 두배를 물어주겠다”며 회사들을 고객으로 확보했다고 전해진다. 자기 돈을 들이지 않고 회사채를 전량 인수해 돈을 벌었던 것이다.

    그는 평소에 쌓아놓은 증권사와 투신사 인맥을 이용해 마진을 남기고 파는 중개업을 했다. 25세에 김씨가 설립했던 대흥사는 당시 동방증권(현 SK증권), 신영증권, 서울증권(현 유진투자증권)과 거래했다. 그가 했던 이런 방식의 거래금액은 최대 연간 1조 7000억원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98년 한 해 동안 국공채를 팔아 차액을 남기는 방식으로 김씨가 벌어들인 수익은 530억원에 달했다. 많게는 하루 만에 65억원을 벌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40세였던 김씨의 재산은 5000억원 정도로 추산됐다.

    사채업자 꼬리표 떼고 증권사 오너로 등극

    김씨는 새로운 사업에서도 수완을 발휘했다. 먼저 손을 댄 것은 증권회사 경영이었다. 이른바 제도권 금융 사업을 하지 못했던 것에서 한계를 느꼈던 데다, ‘사채업자’라는 꼬리표도 떼고 싶어했던 그였다. 김씨는 평소 “나는 사채(私債)업자가 아닌 회사채(會社債)업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김씨는 외환위기가 터지자 1998년 경영난에 허덕이던 동아증권(현 NH농협증권)을 30억원가량에 인수했다. 그는 한 주당 880원대에 머물던 동아증권 주식 261만주를 주당 1300원에 사들였는데, 당시 동아증권은 자본금을 70억원이나 까먹은 상태였다.

    그는 동아증권을 인수하고서 세종증권으로 사명을 바꿨다. 이후 사이버트레이딩 수수료를 업계 최저수준으로 낮추고 비싼 휴대용 단말기를 고객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의 영업전략을 펴면서 단기간에 업계 10위 수준으로 회사를 올려놓기도 했다.

    김씨는 2005년말 약 1103억원에 세종증권을 농협중앙회에 넘겼다. 8년 전 김씨가 세종증권을 인수한 가격을 제하더라도 최소 수백억원의 차익은 남겼을 것이라는 게 주변 관계자들의 추측이었다.

    김씨는 세종증권을 매각한 이후에 통신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 같은 김씨의 행보를 두고 주위에서는 ‘김형진이 망하러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통신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김 회장이 잘 모르는 분야에 도전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김씨는 2007년 법정관리 중인 통신업체 엔터프라이즈네트웍스(현 세종텔레콤)를 740억원에 사들였다. 하지만 법정관리를 받던 기업은 5년 만에 흑자기업이 됐다. 2014년 상반기 기준 세종텔레콤은 연결 기준 매출액 559억원, 영업이익 23억원을 기록했다.

    주식 투자했다 쪽박 차고 구속되기도

    김씨가 ‘큰손’으로 불리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1999년 8월 그는 채권 중개 매매로 530억원을 벌어들이는 과정에서 당국의 허가 없이 매매한 혐의(증권거래법 위반)로 구속기소 되기도 했다.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지만 이후 상고심에서 벌금형(4500만원)만 확정됐다. 이 과정에서 관련 내용에 대한 수사 발표가 지연되기도 했는데, 당시 관련 업계에서는 ‘김씨 회사의 뒤를 봐주는 여권 실세가 수사를 막으려 하고 있다’거나 ‘고위 공직자가 관련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김씨가 동아증권을 인수하는 과정에서도 뒷말이 무성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서 ‘재벌 해체’라는 말이 나온 이후 동아그룹 중에서는 동아증권이 첫 번째 매각대상에 포함됐는데, 당시로써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고 설립 1년도 되지 않았던 신생 회사인 세종기술투자가 동아증권을 인수했다는 사실에 ‘정치권에서 김형진을 감싼다’는 풍문도 나돌았다.

    2008년에는 세종증권을 농협에 되판 과정이 문제가 됐다. 세종증권 매각을 성사시키는 대가로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고교 동기인 정화삼씨 형제와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가 검찰에 구속됐는데, 이들이 매각 성사 사례금으로 받은 돈이 김씨의 돈이라는 게 검찰 수사의 이유였다. 김씨는 검찰에 체포됐으나, 뚜렷한 혐의가 없어 이틀 뒤 석방됐다.

    앞서 1980년대에는 주식에 손을 대며 빈털터리가 된 적도 있었다. 1985년 130선이었던 종합주가지수는 불과 4년 만에 1000을 넘어섰다. 당시 김씨의 동업자 역시 1년 동안 100억원이 넘는 돈을 벌었는데, 김씨는 이를 보면서 주식 투자에 나서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이때 부렸던 욕심이 결국 화를 불렀다.

    그는 아예 채권 사업을 접고 전 재산을 주식에 투자했다. 여기에 일부 자금을 빌리고, 증권사에서도 수 십억원의 미수를 받아 주식에 투자했다. 이 돈이 뻥튀기 돼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지만, 김씨에게 남은 것은 20억원의 빚이었다. 훗날 금융실명제를 기회로 다시 일어섰던 그였지만, 적어도 주식투자에서는 낙제점을 받았던 셈이다.

    1958년 10월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난 김씨는, 현재 세종그룹 대표이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김씨는 비상장사인 세종을 포함해 코스닥 상장기업인 온세텔레콤, 비상장사인 세종텔레콤, 자산관리 회사인 디엠씨씨매니지먼트 등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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