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큰손들]② "서울 들어가려면 '광화문 곰'의 땅을 안 밟을 수 없다"

조선비즈
  • 하진수 기자
    입력 2014.10.24 09:52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에 있는 통일교육원 2층에는 가로 60㎝, 세로 80㎝ 크기의 부조상이 하나 서 있다. 부조상 하단에는 ‘겨레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이곳 통일교육원 부지 1만6878평을 흔쾌히 기부하신(1987.8.12) 송암 고성일님의 높고 푸른 뜻을 기립니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부조상의 주인공인 고성일씨는 ‘광화문 곰’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큰손이다.

    그는 큰손답게 씀씀이가 남달랐다고 전해진다. 통일교육원 부지를 나라에 기부할 때의 일화다. 1987년 여름. 정부는 통일교육원을 지을 장소를 물색하다가 삼각산 인근을 교육원 자리로 점찍었다. 땅의 주인은 고씨였다. 고씨는 나라에서 땅을 사고 싶어한다는 소식을 듣자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선뜻 땅을 내놨다. 당시 땅값은 23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통 큰 기부를 하기도 했던 고씨지만, 고씨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돈을 쓸 줄 아는 사람’이라는 평이 있는가 하면, ‘신사답지 못한 큰손’이라는 꼬리표도 따라다닌다. 이처럼 고씨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야기는 197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 증시 자금 30%를 움직여 ‘광화문 곰’ 호칭 얻어

    고씨가 증시에 관심을 가진 시기는 1970년대 후반으로 알려졌다. 1978년 고씨는 100억원이라는 돈을 들고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사실 주식은 고씨의 주전공이 아니었다. 뒤에 자세히 얘기하겠지만, 어찌 됐든 주식은 고씨에게도 생소한 투자처였다. 그렇다면 비전공자인 고씨가 주식시장에 거금을 베팅하기로 한 배경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주식시장의 상황을 간단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1970년대 국내 주식시장은 ‘돈 넣고 돈 먹기’식의 투기 광풍이 불던 때였다. 상장 주식이 몇 종목 되지도 않은데다 거래량도 많지 않아 종목들이 급등락하기 일쑤였다. 1960년대 중반 기준으로 상장회사는 5개 시중은행을 포함해 모두 15개에 불과했다. 그나마 순수 민간기업은 5개밖에 안 됐고, 나머지 회사들 주식은 대부분 정부 소유였다.

    1960년대 말 300원대에 머물던 증권금융주식회사라는 종목이 있었다. 일명 증금주로 불렸던 해당 종목은 그나마 유통주식 수가 많아 투자자들이 몰리던 종목이었다. 증금주는 1년 만인 1970년 12월 1027원까지 치솟았다가, 1971년 여름에는 2000원을 기록했다. 당시 증권거래소는 서울 명동에 있었는데, 자연스레 명동의 큰손들은 주식시장이 돈을 굴리기 자연스레 좋은 투자처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말은 건설주가 또 한 번 주식시장에 붐을 일으켰던 시기다. 중동에서 들어오는 오일머니로 인해 건설사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회사 이름에 ‘건설’이라는 두 글자면 들어가면 주가가 들썩였다.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 명동에 나가보면 건설주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건설사 주식을 사기가 어려워 암거래도 이루어졌는데, 10배 이상 오른 건설사 종목도 속출했다.

    상황이 이와 같자 돈 놀릴 곳을 찾던 고씨 역시 그간 쌓아두었던 막대한 현금을 들고 주식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80년 건설사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 광화문에 사무실도 차렸다. 그가 사들이는 주식마다 가격이 급등하자 사람들은 그에게 ‘광화문 곰’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당시 명동에서는 “우리나라 하루 주식 거래대금의 3분의 1은 광화문 곰의 돈”이라는 말도 나돌았다.

    고씨는 단순하면서도 언뜻 과격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만의 투자 스타일을 고수했다. 고씨는 일단 시중에 건설사 주식이 풀리면 무조건 쓸어담았다고 한다. 막대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고씨가 특정 종목을 매집하기 시작하면 해당 주식은 씨가 마르게 된다. 건설업종이 좋으니 당연히 주가는 더욱 뛰기 마련이다. 고씨는 이때 쟁여뒀던 물량을 풀어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이러한 고씨 특유의 투자방법은 결국 화를 부른다. 고씨는 현재의 SK로 이름이 바뀐 유공 주식을 매집했다. 주가 상승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유공 주식은 계속해서 가격이 떨어졌다. 이를 두고 세간에서는 고씨의 투자스타일을 잘 아는 작전 세력이 미리 유공 주식을 사들였다가 고씨한테 파는 역(逆)작전을 펼쳤고, 고씨가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주식시장이 활황을 끝내고 침체기에 들어선데다, 외국인 투자가 1992년부터 단계적으로 허용되기 시작하는 등 주식시장 규모가 제법 커져 예전처럼 고씨가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는 점도 고씨의 실패를 부채질했다. 그럼에도 고씨는 본인의 감을 믿고 투자에 나섰다. 고씨는 계속된 투자 실패로 곳간이 비자 여러 금융기관에 손을 내밀기도 했다.

    ‘38따라지’로 막대한 富 일군 명동 사채시장 1세대

    고씨는 ‘현금왕’ 단사천, ‘백할머니’ 백희엽씨와 함께 북한에서 넘어와 명동 사채시장을 주름잡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38따라지’로 불렸다. 황해도 연백 출신인 고씨는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20대 초반 한강 이남에서 광목을 사다가 상대적으로 옷감이 귀했던 지금의 북한 지역에 이를 내다 파는 방법으로 일찌감치 부를 쌓았다. 장사꾼으로서 수완을 타고났던 셈이다.

    광복 직후 월남한 고씨는 무역 회사를 차렸다. 암달러 시장의 주무대였던 남대문시장에 둥지를 튼 회사 이름은 수도염료상사였다. 고씨는 옷을 염색하는 원료인 염료를 수입해 내다 팔았는데, 그는 당시 20억원대에 이르던 염료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고씨는 염료를 수십 배의 차익을 남기고 팔았다. 당시 고씨 회사에는 염료를 구하기 위해 전국에서 염색업자들이 몰려 매일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전해진다.

    이미 사업가로 떼돈을 벌었던 고씨를 ‘거부’ 반열에 오르게 한 결정적인 투자처는 ‘땅’이었다. 고씨는 평소 ‘땅이 최고다’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고씨는 1960년대 중반부터 서울과 수도권 등지의 땅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한때 개인 부동산 소유 1위라는 타이틀도 거머쥐었다. 당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고성일의 땅을 밟지 않고는 서울로 들어올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고씨의 예상은 적중했다. 1980년대 강남 개발 붐이 일자 고씨는 토지보상비로만 500억원이란 거액을 손에 쥐었다. 본격적인 아파트 개발과 함께 말 그대로 돈벼락을 맞은 것이다. 개인 사업과 부동산 투자로 일반인들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엄청난 부를 일궜던 고씨였지만, 그의 말년은 순탄치 못했다.

    1990년대 들어 고씨의 주식투자가 계속해서 실패하자 일부 증권사는 고씨에 대해 더는 신용융자를 해주지 않게 된다. 광화문 곰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고씨의 불운은 1990년대 초 계속해서 이어졌다. 1991년 고씨는 한보철강에 대해 시세조정을 했다는 혐의로 고발됐다. 당국은 고씨가 한보철강 주식 80여만주를 샀다가 되파는 과정에서 주가를 조작해 1억원의 매매차익을 챙겼다고 밝혔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동부 등 23개 신용금고가 고씨에 대해 사업자등록증이 위조된 명의의 불법대출을 해주거나 제3자 명의를 이용하는 방법 등으로 변칙대출을 해준 사실이 드러났다. 불법대출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경기, 송탄 상호신용금고에는 예금주의 예금인출 요청이 쇄도하며 예금지급 동결조치가 내려지기도 했다.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가던 고씨가 언론에 다시 등장한 것은 1997년이다. 그해 6월 서울 강남구 개포동 대모산 내 28만여평의 자연공원 토지소유주였던 고씨는 포클레인과 인부 10여명을 동원해 대모산 등산로에 철망설치 작업을 강행한 것이다. 고씨는 대모산에 체육시설 등을 설치한 강남구를 상대로 소송을 내 1억여원의 배상판결을 받았었다. 고씨는 1997년 9월 10일 77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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