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이 은행의 각종 서비스 원가(原價)를 분석해 수수료를 현실화해 주기로 했다는 소식에 소비자들이 반발하고 있다. 금감원의 방침은 최근 은행의 수익이 격감하면서 건전성 유지가 우려되자 수익을 벌충해 주기 위한 긴급 대책의 성격이 짙다.
은행의 주먹구구식 수수료 책정을 개선하기 위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수수료 책정 기준을 마련할 필요성이 있긴 하다. 하지만 소비자단체들은 수익 벌충을 위한 수수료 인상은 곤란하며, 은행의 임금 동결 등 비용 절감을 위한 노력이 먼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은행의 수수료, 산출 근거 불분명
우리나라 은행의 수수료는 선진국 은행들의 수수료 체계에 비해 불합리한 점이 많다. 수수료를 정하는 명확한 기준이나 원가 산출 근거가 없다 보니 동일한 서비스에 대해 은행마다 수수료가 제각각이다. 은행 자동화기기를 이용해 영업 마감 후에 10만원을 송금하면 기업은행은 700원을 받지만, 전북은행은 2배가 훨씬 넘는 1600원을 받는다. 외국으로 송금(5000달러 기준)을 할 때도 하나은행은 1만2000원, 우리은행은 1만5000원이다. 우량 고객이 아니면 은행 직원 손을 거치지 않는 인터넷뱅킹 송금을 하더라도 건당 500원 이상의 수수료를 물린다. 금감원 관계자는 "대형 은행이 수수료를 정하면 중·소은행들도 적당한 선에서 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과 유럽 은행들은 ATM기기를 이용해 돈을 인출할 경우 영업시간 중이든 영업 외 시간이든 구분 없이 수수료를 받지 않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은 영업시간 내 거래은행 현금 인출은 공짜인 데 반해 영업 외 시간 현금 인출은 돈을 받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선진국 은행들은 고객들의 자산관리 컨설팅을 해주면 수수료를 받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은 공짜로 해준다. 예를 들어 은행 PB센터에서는 억대 연봉을 받는 은행 회계사와 변호사가 부자 고객을 상대로 재테크에서 상속 문제까지 상담을 해주지만 수수료를 받지 않는다.
◇오락가락하는 금감원 수수료 정책
2011년 8월 금감원은 당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 지시에 따라 은행 담당자들을 금감원에 불러놓고 "은행들이 불합리한 수수료를 개선해야 한다"고 압박하며 송금 등 각종 수수료를 끌어내렸다. 신한은행 등이 송금 수수료를 250~1000원씩 일제히 내렸고, 국민은행은 같은 은행 계좌 송금 수수료는 아예 없애기도 했다. 당시 수수료 인하는 정치논리에 의한 것으로 은행의 수익을 갉아먹는 데 일조했다. 경기침체로 대기업 부실채권이 늘어나며 은행의 수익기반이 급격히 무너지는 조짐을 보이자 금융당국이 은행의 건전성 제고를 위해 수수료 인상안을 검토하게 됐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6일 "은행의 순익이 절반으로 떨어졌다. 금융권의 수익 기반 확대를 위해 각종 수수료를 현실화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금감원은 이번에 은행들이 금융서비스별로 수수료 산정 관리 기준을 담은 '모범 규준'을 만들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수수료 모범 규준에는 수수료 원가 산정 방식과 산정 절차 등을 담고, 외부 회계법인의 평가 또는 소비자단체의 검증 등도 거치도록 할 예정이다. 금감원은 원가를 분석해 수수료 인상 요인이 있다고 판단되면 수수료 인상을 용인할 방침이다.
◇임금 동결 등 비용 절감 노력해야
소비자단체들은 "은행의 수수료 현실화 이전에 비용 절감을 위한 경영 합리화나 자구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기업경영평가 회사인 'CEO 스코어'가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수익성이 악화하는 동안에도 KB국민·우리·신한·하나·외환·기업 등 6개 시중은행 직원의 연봉은 평균 32.7% 늘었다. 현재 시중은행의 1인당 평균 연봉은 8000만원에 달한다. 수익 감소에 우는 소리를 하면서도 임금 동결, 인력 감축, 은행 지점 통폐합 같은 구조조정은 외면하고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박지호 간사는 "은행 임직원의 고액 임금 삭감과 같은 자구 노력 없이 수수료만 인상할 경우 소비자들이 납득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