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조원의 사나이’, 그가 펜을 들면 시장 뒤집힌다?

입력 2013.06.22 13:20 | 수정 2013.06.23 07:48

지난 6월 7일 JP모건이 내놓은 한 장짜리 ‘삼성전자 보고서’는 한국 증시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JP모건이 이 회사와 계약을 맺은 투자자와 시장 관계자에게 배포한 보고서로 인해 삼성전자 주가는 대폭락했다. 삼성전자 주가는 이날 하루만 6.18% 추락하여 15조원에 이르는 시가총액이 증발해 버렸다. 삼성전자 주가 폭락을 이끈 JP모건의 삼성전자 보고서 발간을 주도한 인물은 JP모건 증권 서울지점 박정준(42) 전무다.

기자가 6월 12일 인터뷰를 위해 박정준 전무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리포트에 있는 내용이 전부입니다. 그와 관련한 내용은 회사(JP모건) 컨플라이언스(준법 규정) 때문에 지금 말씀드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컨플라이언스 부서를 통해 (인터뷰 등 관련 내용을 요청)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는 국내 주식 시장에서 반도체 및 IT 리서치 분야의 대표적 애널리스트로 꼽힌다. 세계적 증권사인 JP모건의 ‘아시아·태평양 반도체 리서치 헤드’이다. 6월 7일자 ‘삼성전자’ 보고서는 “서플라이 체인(카메라모듈, 케이스 업체, AP) 확인 결과, EU와 한국 내수 시장의 부진한 수요로 7월을 시작으로 3분기 월간 주문량이 700만~800만대 수준(원래 1000만대)으로 20~30%로 줄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보고서에는 ‘핸드셋 부문의 이익 하락으로 2013년과 2014년 이익 추정치를 하향시키고, 2013년 12월 기준 210만원이던 목표(주)가를 190만원으로 낮춘다. 예상치를 하회하는 (갤럭시) S4의 출하량과 높은 시장 기대치를 감안하면 당분간 (삼성전자의) 주가 상승은 제한적일 전망이다’란 내용도 있다.

JP모건 보고서가 공개되자마자 투자자와 시장은 심하게 요동쳤다. 6월 5일만 해도 152만1000원(종가 기준)을 기록했던 삼성전자 주식은 6월 7일 이 보고서가 나오자 한때 142만4000원까지 추락했고(6월 6일은 현충일 휴무), 결국 전날 대비 6.18% 하락한 142만7000원으로 장을 마감했다. 6월 5일까지만 해도 224조422억9100만원에 이르던 삼성전자의 시가총액이 하루 만에 13조8761억3700만원이 증발하며 210조1961억5300만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삼성전자의 보통주만 하락한 게 아니다. 삼성전자 우선주도 큰 폭으로 하락했다. 6월 5일 95만원(종가 기준)이던 주가가 6월 7일 8.84%나 떨어진 86만6000원으로 급락한 것이다. 21조6917억원을 넘던 삼성전자 우선주 시가총액 역시 19조7737억원대로 추락하며 하루 만에 1조9180억원에 이르는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JP모건 박정준 전무 photo 매일경제
결국 JP모건의 보고서가 나온 6월 7일 단 하루 만에 보통주와 우선주를 합쳐 ‘15조7641억원’에 이르는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증발한 것이다. 삼성전자 주가가 하루 동안 6% 이상 폭락(보통주 기준)한 건 2012년 8월 27일 이후 처음이다. 당시 미국 법원 배심원단이 삼성전자와 애플 간의 특허소송에서 애플의 손을 들어주면서 삼성전자 주가가 7.45% 하락했었다.

삼성전자 주가 폭락 쇼크는 삼성전자에만 영향을 미친 게 아니었다. 한국 주식시장 시가총액(코스피 기준)에서 20%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삼성전자가 무너지면서 6월 7일 이후 주식 시장 전체를 요동치게 만들었다. 6월 5일 1959.19포인트이던 코스피 지수는 삼성전자 주가가 추락한 6월 7일 하루 35.34포인트가 떨어지며 1923.85포인트로 마감했다. 사실상 코스피 지수 하락분의 70%가 삼성전자 주가 하락률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국 주식 시장 전체 총액 중 이날 하루 사라져 버린 시가총액 규모만 무려 21조8232억9500만원에 이른다.

JP모건 보고서를 쓴 박정준 전무는 시장에서 ‘객관적 분석에 충실한 애널리스트’로 알려져 있다. 기업 실적이나 영업상황, 시장 전체 상황 등에 대한 객관적 검증·분석을 하기보다 무조건 ‘매수’를 외치거나 경쟁하듯 목표주가를 올려놓고 보는 국내 몇몇 증권사와 애널리스트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반도체 및 IT 관련 리서치 분야에서 박 전무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는 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익명을 요청한 한 외국계 투자사의 임원은 박 전무에 대해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신중한 분석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분석능력, 신뢰도, 평판 등 애널리스트로서 많은 부분에서 상당히 높게 평가받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그는 “세계 최고 IB(투자은행) 중 한 곳인 JP모건에서 리서치 헤드를 맡고 있다는 것만으로 능력과 신뢰도는 검증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했다.

박 전무는 2000년 이전 미국 인디애나대학에서 MBA를 마치고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에 입사해 IR(Investor Relations·주식 및 투자 담당) 담당자로 일한 경력이 있다. 이런 경력 때문인지 박 전무는 산업 현장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애널리스트로 꼽힌다. 그가 산업 현장에서 자본 시장으로 진로를 바꾼 건 2000년이다.

2000년 하이닉스반도체를 퇴사한 후 곧바로 굿모닝신한증권(현 신한금융투자)에 반도체산업 담당 애널리스트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으로 자본 시장과 인연을 맺었다. 그리고 2001년 외국계 ING베어링(현 맥쿼리증권)으로 자리를 옮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의 JP모건 리서치센터에 둥지를 틀었다.

박정준 전무는 올해로 13년째 애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 중 애널리스트 생활을 처음 시작한 2001년 단 한 해를 빼곤 12년을 줄곧 외국계 투자은행(IB)과 증권사에서만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이런 경력 때문인지 사실 박 전무는 국내 시장보다는 아시아·태평양 시장에서 ‘JJ Park’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박 전무가 한국 시장에 자신의 존재감을 인식시킨 건 2005년쯤부터다. 2005년에도 삼성전자는 한국 시장을 상징하는 대표기업이었다. 이 때문인지 당시에도 대부분의 국내외 증권사와 애널리스트들은 삼성전자의 기업 분석과 매수 추천, 목표주가에 대해 맹목적이라고 할 만큼 매우 후한 점수를 남발하고 있었다.

‘적극 매수(Strong Buy)’와 ‘매수(Buy)’ 투자의견이 범람하던 2005년 9월, JP모건 애널리스트로 있던 박 전무는 삼성전자에 대해 ‘중립’ 투자의견을 내놓았다. 삼성전자에 대한 박 전무의 ‘중립’ 투자의견은 2005년 9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2년 넘게 유지됐다. 2007년 11월 투자의견을 ‘비중확대’로 상향하기까지 2년 동안 그는 삼성전자에 대해 ‘매수’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기간 삼성전자 주가는 2006년 1월 잠시 70만원대를 뚫긴 했지만, 나머지 2년여 동안 50만원대 초·중반에서 60만원대 중반을 오르내리는 지루한 박스권에 갇혀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에 대한 박 전무의 분석과 관점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런 신선함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이 알려지면서 박 전무에 대한 시장 신뢰도와 영향력이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랬던 박 전무가 지난 6월 7일 다시 삼성전자에 대해 2013년 이익 추정치 하향을 언급하며, 210만원으로 제시돼 있던 2013년 연말 기준 목표주가를 190만원으로 낮춘 것이다. 당분간 주가 상승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전망까지 내놓았다.

박 전무가 6월 7일 보고서를 통해 기본적으로 목표주가를 낮추고 제한적 주가상승 전망을 내놓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보고서를 끝까지 보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전망도 나온다. ‘애플과 노키아의 전철을 따르지는 않을 전망’이란 점과 ‘삼성전자의 이익 모멘텀이 온전해 시장의 기대가 리셋됐을 때 주가는 결국 우상향(상승)으로 갈 것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장과 투자자들이 이런 내용보다 ‘1000만대 수준이던 월간 주문량이 3분기 700만~800만대 수준으로 20~30%로 줄었다’는 삼성전자 스마트폰 주문량 축소나, ‘(갤럭시) S4의 모멘텀이 (갤럭시) S3보다 더 빨리 약해지고 있다.… 예상치를 하회한 고성능 스마트폰 출하량이 마진을 낮출 것으로 예상된다’는 마진 감소, 또 ‘2013년, 2014년 이익 추정 하향, 목표 주가 하향, 주가상승 제한적’이란 내용에 더 강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6월 7일 이후 삼성전자 주가 폭락을 이끈 주된 원인인 것이다.

JP모건 박정준 전무의 보고서가 나온 후 삼성전자 주가가 맥을 못 추자 국내 언론과 금융·시장 감독 당국은 이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이들은 삼성전자 주가 급락 사태와 관련해 확인이 쉽지 않은 섣부른 설들도 쏟아내고 있다.

일부 언론은 ‘외국계 보고서의 불편한 진실’이나 ‘외국계 보고서 그들만의 작전’ ‘삼성전자 이상한 주가폭락’ 식의 기사를 통해 일종의 ‘음모론’을 거론하는가 하면, 배당을 두고 삼성전자와 몇몇 외국계 자본 간의 보이지 않는 기싸움 과정에서 벌어진 외국계 자본의 ‘삼성전자 길들이기’라는 설까지 거론했다. 심지어는 ‘JP모건 보고서가 나오기 2~3일 전 JP모건의 고객사들이 발표 내용을 알고 미리 선물·옵션 투자를 했거나 공매도에 나선 것 아니냐는 설도 나돌고 있다’는 식의 무책임한 기사까지 등장했다.

삼성전자 주가와 한국 주식 시장이 심하게 요동치게 된 데는 JP모건의 보고서가 도화선이 됐다. 하지만 그 보고서가 나온 이후 보고서의 내용을 면밀히 분석하고, 그 정확성을 확인하려는 작업보다 사실 확인조차 어려운 ‘음모론’부터 언급하는 몇몇 언론과 금융당국의 반응이 시장과 투자자들에게 더 큰 불확실성을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시장이 가장 싫어하는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최선의 방법은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분석을 시장과 투자자들에게 가감 없이 보여주며 그것이 얼마나 사실과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노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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