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메리카 대초원에 사는 들쥐(prairie vole)는 부부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다. 한 번 짝짓기를 한 암수는 평생 상대와 새끼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과학자들이 그 비밀을 뇌에서 하나둘씩 찾아가고 있다. 연구 결과는 부부간 사랑뿐 아니라 모르는 사람 간의 협동이나 박애정신도 설명할 수 있다. 정신분열이나 자폐 같은 정신질환을 치료할 단서도 나오고 있다. 들쥐의 사랑이 인간 세상을 바꾸는 셈이다.

우리 남편이 달라졌어요

목초지 들쥐(meadow vole)는 대초원 들쥐와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행동은 딴판이다. 목초지 들쥐 수컷은 짝짓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다른 암컷을 쫓아다니는 바람둥이다.

2004년 미국 에모리대의 래리 영(Young) 교수는 두 들쥐의 차이가 바소프레신 호르몬에 있음을 밝혀냈다. 대초원 들쥐 암컷이 짝짓기하면 바소프레신 호르몬을 분비한다. 영 교수는 바람둥이 들쥐 수컷의 뇌에 대초원 들쥐 수컷의 바소프레신 수용체 유전자를 넣었다. 바로 바람둥이 수컷이 헌신적인 남편으로 탈바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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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를 바꾸지 않아도 바람기를 잠재울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 모하메드 카바히(Kabbaj) 교수는 대초원 들쥐가 짝짓기하고 나서야 행동이 달라지는 데 주목했다. 즉 타고난 유전보다는 후천적인 변화라는 말이다. 연구진은 유전자 자체를 바꾸지 않고도 부부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가정했다.

실이 실패에 감겨 있듯 DNA 가닥은 히스톤이란 단백질에 감겨 있다. 유전자가 작동하려면 DNA 가닥이 풀려야 한다. 들쥐 뇌에서 바소프레신이나 또 다른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 수용체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연구진은 먼저 대초원 들쥐 암수를 6시간 같이 뒀다. 이때까지 짝짓기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암컷의 뇌 보상 중추에 DNA 가닥이 잘 풀리게 하는 물질을 주입하자, 암컷은 짝짓기하고 난 것처럼 수컷에게 다정한 행동을 했다. 지난 2일 '네이처 뉴로사이언스' 인터넷판에 실린 논문을 보면 약물 주입을 하면 짝짓기를 하고 난 것처럼 바소프레신과 옥시토신 호르몬 수용체가 활발하게 작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수컷도 마찬가지일 것으로 추정했다.

이웃 사랑 부르는 사랑 호르몬

사람에게도 같은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 몇몇 연구는 그 가능성을 보여준다.

2008년 스웨덴 카롤린스카연구소의 하세 발룸(Walum) 박사팀은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스웨덴 쌍둥이 500쌍의 유전자를 분석한 결과를 발표했다. 바소프레신 수용체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결혼을 못한 비율이 32%로, 정상인(17%)의 두 배 가까이 됐다. 결혼 후에 위기를 경험했다는 비율도 3분의 1이나 됐다. 정상인 사람은 그 비율이 15%에 그쳤다.

사랑 호르몬은 부부 사이에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다. 2005년 스위스 취리히대 경제학과의 에른스트 페르(Fehr) 교수는 '네이처'지에 들쥐의 사랑 호르몬인 옥시토신을 사람의 코에 뿌리면 상대에 대한 신뢰감이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남성 128명을 대상으로 투자게임을 진행했더니 옥시토신 냄새를 맡은 사람의 45%가 상대를 믿고 돈을 맡겼다. 냄새를 맡지 않은 사람에서는 그 비율이 21%에 그쳤다. 옥시토신은 기부 행위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랑 호르몬은 얼굴을 모르는 사람까지도 포용하는 것이다.

정신질환 치료에도 도움 줄 듯

이번 플로리다 주립대 연구진의 실험은 정신질환 치료에도 빛을 비추고 있다. 동물실험에서 출생 후 어미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유전자 자체는 정상이나 주변에 달라붙는 물질이 변화돼 비정상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람에게 나타나는 자폐증이나 정신분열도 후천적으로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해 생긴다고 알려졌다. 생쥐 새끼가 옥시토신 호르몬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미를 따라다니지 않는다. 이는 인간이 자폐증에 걸린 것과 같다. 이번 대초원 들쥐 실험과 같은 방법으로 이런 후천적 변화를 제거한다면 새로운 정신질환 치료법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