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135조원. 박근혜 당선인이 기초연금 도입, 4대 중증질환 100% 건강보험 적용 등 굵직한 복지 공약들을 실천하기 위해 마련하겠다고 약속한 예산 규모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직전인 지난달 16일 열린 3차 TV토론에서 "정부의 비효율적 비용을 줄여 재원의 60%를 마련하고, 세수 확대를 통해 나머지 40%를 조달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박 당선인 측은 공약집에서 예산 절감과 세출 구조조정(71조원), 세제 개편(48조원), 복지행정 개혁(10조6000억원)을 하면 이 돈을 마련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민간 전문가들은 물론 직접 예산 편성에 참여했던 전직 장관들도 "이런 계획은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1년에 14조원씩 예산 절감? 정부·전문가 "불가능"
예산 절감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매번 등장한 '숙제'이지만, 성공한 사례가 없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인수위는 소득세와 법인세를 깎아주고, 대신 불필요한 예산 지출을 부처별로 10%씩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이행되지 못했다. 당시 예산 편성에 참여했던 정부 관계자는 "2008년 2조5000억원을 절약한 것이 예산 절감 성과의 전부였고,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예산 절감 방안은 다시 시도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사례는 과거 노무현·김대중 정부에서도 찾을 수 있다.
현재 정부 예산 지출의 구성 내역을 보면 예산 절감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할 수 있다. 올해 예산 342조원 중 160조원이 법에 의해 자동으로 집행된다(의무지출). 정부 지출에서 의무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앞으로 계속 높아진다〈그래픽 참조〉. 의무지출 예산이 아닌 나머지 182조원도 정부가 전부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이 돈에서 공무원 인건비와 건물·시설 유지비, 중단할 수 없는 도로·철도·건물 등 SOC(사회간접자본) 예산을 집행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니 전직 장관들도 문제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강봉균 건전재정포럼 대표는 "당선인 공약을 보면 매년 14조원(71조원/5년)을 깎는다고 하는데 올해 예산만 해도 복지 재원을 마련한다며 국방 같은 데서 4조원 정도를 깎고 나니 여러 비판이 나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4조원 깎은 것으로도 많은 비판이 나오는데 14조원씩 깎아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권오규 카이스트 교수(전 부총리)도 "재정위기로 고전하는 선진국들이 예산 절감이나 세출 구조조정을 몰라서 그렇게 빚이 늘었겠느냐"며 "세출 구조조정은 이해관계자가 많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민간 전문가들은 부가가치세 증세나 소득세율 추가 인상 등 증세 방안이 검토돼야 한다고 말한다.
◇난색 표하는 정부 부처들, '인수위 설득' 고민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은 공약 이행 계획을 인수위에 보고해야 하는 정부 부처들이다. 특히 예산과 세제를 책임지고 있는 기획재정부의 고민이 깊다. 기재부는 지난 10일 업무보고 내용을 놓고 주요 실국장들이 모여 비공개회의를 했는데, 재원 확보 방안과 세제 개편과 관련해 당선인 측 계획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았다고 한다. 기재부 관계자는 "국회에서 법을 바꿔, 복지 지출이나 지방 재원 배분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지 않는 한 (당선인 측 재원 마련 계획은) 힘들다는 게 솔직한 생각"이라고 했다.
예산을 많이 쓰는 다른 부처들도 고민에 빠졌다. 교육과학기술부의 경우 '반값 등록금'공약 이행에 매년 약 7조원이 필요하다. 대학과 외부장학금 등에서 3조원을 조달하고 나머지 4조원은 정부가 마련해야 한다. 교과부는 올해 2조7750억원을 장학금으로 지원할 예정인데, 내년에 반값 등록금을 확대 시행하려면 1조2000억원의 예산을 더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대학 투자 예산을 줄여 이 돈을 마련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국방부도 예산 절감 항목을 찾느라 고민 중이지만,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국방 예산은 34조3453억원으로 전체 국가 예산의 10%다. 국방부는 현재 예산도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국회가 2013년 국방비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군 방위력 개선(전력 증강)' 예산을 4009억원 삭감한 것에 김관진 장관이 직접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