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서울의 한 예식장에 화환 150개가 죽 늘어섰다. 절반은 정·관계 인사들이 보낸 화환, 절반은 대기업 계열사 등 재계 인사들이 보낸 것이었다. 고급 양복을 입은 중년 남성들이 줄지어 방명록에 서명하고 명함을 교환했다.
얼핏 보면 기업체 세미나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지만, 모 공기업 임원이 자녀를 결혼시키는 자리였다. 참석자 A씨는 "우리 회사가 급할 때 신부 아버지(공기업 임원)가 모른 척하면 회사가 휘청거릴 수 있다"면서 "우리 업계에서 그는 그냥 갑(甲)이 아니라 '수퍼 갑'"이라고 했다.
직원들이 "결혼식이 곧 시작되니 다들 자리에 앉아 달라"고 세 차례 방송을 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뒤쪽에 서 있었다. 직원이 돌아다니며 "앉아 달라"고 하자 한 하객이 "여기 오신 분들은 다들 바쁜 사람들"이라면서 "분위기 봐서 가려고 한다"고 했다. 목소리를 낮춰 급하게 전화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오늘 아무개씨 자녀분 결혼식 하는 날인데, 연락 못 받으셨어요? 오고 계신다고요? 저는 지금 와 있습니다."
500석 식장이 꽉 찬 가운데 신랑·신부가 입장했다. 뒤늦게 도착한 중년 남성 몇명이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1시간30분에 걸쳐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많은 하객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이날 주례는 양가 혼주와 신랑·신부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들인지 하객들 앞에서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참석자 C씨가 옆 사람에게 "자식이 뭐 한대?" 라고 묻자 "나도 잘 모른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석에 앉은 사람 20여명과 신랑·신부 또래 젊은이 20여명을 빼면 절대다수가 신혼부부에게 관심 없어 보였다.
새우 애피타이저·버섯 수프·송로버섯 소스를 친 호주산 쇠고기 안심 스테이크…. 여덟 가지 요리를 차례대로 묵묵히 먹는 하객들 앞에서 전문 가수가 팝송을 축가로 불렀다. 혼주가 축배를 제안했다. 하객 상당수가 모르는 사람끼리 둘러앉아 있다가 어색한 얼굴로 허공에 잔을 들었다 놓았다.
하객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 호텔 직원들이 화환 리본 일부를 가위로 일일이 잘랐다. "보낸 사람 이름 적힌 부분만 따로 모아 혼주에게 건네고, 나머지는 버린다"고 했다. 화환 쓰레기를 싣고 갈 트럭이 진작부터 1층에 대기하고 있었다.
이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려면 최소 8000만원 이상이 든다. 이날 나온 코스 요리는 1인당 9만2000원, 칠레 와인은 병당 6만원, 웨딩케이크는 100만원, 혼주 거래처에서 보내온 화환은 개당 10만~15만원짜리였다. 웬만한 젊은이 3~4년치 연봉이 불과 90분 사이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