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채 진단]⑥ 맏형 은행이 나서고 개인회생제도 개선해야

입력 2012.01.05 15:15 | 수정 2012.01.05 18:02

금융산업의 맏형격인 은행권이 가계부채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가계부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1·2금융권을 망라하는 실무적인 대책을 주도해야 한다는 게 골자다. 다중채무자의 현실을 감안할 때 아킬레스건으로 등장한 2금융권의 가계부채 문제를 강건너 불구경하듯 했다간 은행권도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다.

선진국과 달리 채권자에게 너무 유리한 개인 파산·회생제도도 정비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를 통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보다 손쉽게 패자부활전을 치룰 수 있는 선순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금리 등 거시변수의 변동에 따른 리스크를 개인에게 전적으로 지우고 있는 대출관행도 개선 대상으로 꼽힌다.

◆ 은행권 주도적 역할 절실…1·2금융권 다중채무자 협의체·개인워크아웃 등 거론

금융시스템의 중심축은 은행권은 그동안 가계대출의 과실인 이자수익을 가장 많이 향유해 왔다. 심지어 은행마저도 개인의 상환능력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묻지마 대출에 나서는 행태까지 보여왔다. 은행권이 가계부채 급증의 책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또 정부의 경제정책에 가장 큰 혜택을 입어온 은행권이 금융시스템의 수호자로 나설 책무도 있다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은행권이 1금융권과 2금융권으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중채무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중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다중채무자 문제는 은행, 저축은행, 보험, 증권 등 각 금융권역이 개별적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선 은행연합회가 주도해 각 금융권역 협회들이 참여하는 다중채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체를 만드는 방안이 제시된다. 이를 통해 다중채무자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해 채무 조정의 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금융권 한 고위 관계자는 “다중채무자가 최대 480만명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며 “폭발력이 강한 다중채무자 문제를 풀기 위해 은행권이 2금융권과 협의할 수 있는 채널을 주도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은행들이 다중채무자 고객들의 2금융권 대출을 새희망홀씨나 계열 저축은행의 환승론 등으로 갈아타게 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또 환승론만으로는 이자만 줄일 뿐 원금은 그대로이기 때문에 원금 상환 능력이 없는 다중채무자에 대한 대책도 필요하다. 김정인 코리아크레딧뷰로(KCB) 연구소장은 "은행들이 신용회복위원회의 프로그램과 별도로 은행의 자체적인 개인 워크아웃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회생시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더 나아가 선제적으로 개인의 채무를 조정하는 개인 프리워크아웃 제도도 방안으로 거론된다.

이같은 금융지원을 하면서 반드시 체계적인 신용 재무 상담도 병행해야 한다. 현재 매월 지출구조가 어떤지, 불필요한 지출에 대해 어떻게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지, 어떤 금융상품을 보유하고 있는지, 금융상품 포트폴리오가 적절한지 등에 대한 '재무 주치의' 역할이 다중채무자 고객들에게는 절실하다. 김 소장은 "은행 자체 개인 워크아웃 등 종합적인 채무 조정을 해주거나 환승론으로 금리를 낮춰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반드시 신용 재무 상담을 함께 진행해 앞으로 또다시 신용불량으로 빠지는 길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러스트=조경표
◆ 금융사-개인 위험 분담 적정비율 산정 필요

우리나라 법 제도와 채권채무 관계, 연대보증 등은 선진국과 달리 철저히 채권자에게 유리한 제도다. 1999년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상시적인 자금 부족 상태였기 때문이다. 대출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특혜로 인식될 정도로 자금 수요가 자금 공급을 크게 초과했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여전히 돈을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정상적인 신용 계층들은 쉽게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이제는 채권자에게만 유리한 제도들을 바꿔야 할 때라는 지적이 많다.

예를들어 한국의 주택담보대출은 채권자인 은행이 전혀 손실을 지지 않는 소구적 담보대출(담보가치가 하락하면 채무자가 담보가치 하락 책임을 모두 지는 제도)이다. 주택 가격 하락 등의 리스크는 모두 채무자가 진다. 따라서 은행은 원금을 떼이면 담보가치와 관계 없이 채무자에게 채권 전액을 끝까지 추심할 수 있다. 채권이 그대로 남기 때문에 은행의 리스크는 상대적으로 낮다. 은행은 주택담보대출을 해주면서 부동산 버블 붕괴 및 개인 파산의 리스크를 개인 채무자에게 떠넘기는 셈이다.

반면 미국의 주택담보대출은 비소구적 담보대출(담보가치가 하락해도 채무자는 담보물 이외의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이다. 집값 등 담보가치가 은행 대출액보다 낮은 수준까지 떨어지더라도 채무자는 집만 압류당하는 것으로 채권채무관계가 종료된다. 채무자는 담보가치 부족액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 은행이 리스크를 분담하는 구조다. 은행은 담보물 평가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므로 담보 평가를 더욱 철저히 할 수 밖에 없다. 미국도 경기가 좋을 때는 채무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막는 데 초점을 맞췄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에는 채무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민간연구소 관계자는 “대출구조가 대부분 변동금리로 돼 있는 등 우리나라의 대출관행은 선진국에 비해 개인에게 훨씬 많은 리스크를 지우는 구조”라며 “금융회사와 개인이 리스크를 적절하게 분담할 수 있는 적정한 비율을 상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 신복위 제도 '원금 상환' 원칙 완화해야

우리나라는 2003년 카드사태를 계기로 개인 워크아웃과 법원의 개인 파산·회생제도가 정비됐다. 2006년에는 통합도산법이 시행돼 파산·회생 절차가 간소화됐다. 채무자가 이용할 수 있는 신용회복 및 채무조정 제도는 신용회복위원회가 실시하는 프리워크아웃(사전채무조정)과 개인워크아웃, 법원이 실시하는 개인회생과 개인파산, 자산관리공사의 채무조정이 있다.

신복위의 제도는 법원보다 절차가 간편해 빠르면 일주일 안에 지원받을 수 있다. 보증인에 대한 채권추심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장점이다. 그러나 원금을 거의 면제받을 수 없고 조건이 까다롭다. 채무조정을 전문으로 하는 박우동 변호사는 “신복위 제도는 원금을 모두 갚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실제로 1년 미만 연체 채무는 원금을 거의 면제해 주지 않고 오래된 채무만 약 30% 면제해주는 것이 고작”이라고 말했다. 채권자는 부실 대출 책임을 거의 부담하지 않는 제도다.

또 신복위와 협약을 체결한 약 3600개 금융기관의 채무만 조정 대상이어서 협약에 참여하지 않은 대부업체 대출이나 사채, 통신비, 세금 등은 제외된다.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하려는 사람들은 일용직 등 저소득자가 대부분인데, 이들은 사채가 많아서 신복위 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 김동환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신복위에 법적 구속력을 줘서라도 등록 대부업체수를 늘려야 신복위 제도가 실효성을 가질 수 있다"며 "신복위를 비롯한 캠코, 지방자치단체, 비영리시민단체(NGO) 등도 힘을 합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파산은 잘 안 받아주고 회생은 5년간 빚 굴레

법원의 개인회생제도는 매월 최저생계비 이상 금액을 상환해야 한다. 따라서 최저생계비 이상 소득자만 신청할 수 있다. 면제 재산범위도 최대 2500만원으로 서울의 주택가격이나 전세보증금에 비해 턱없이 낮다. 2500만원 이상 전세주택에 사는 사람은 월세로 전환하지 않는 한 개인회생이나 파산제도를 이용할 수 없다.

개인회생 기간도 길다. 개인회생 신청을 하면 5년간 소득에서 최저생활비를 뺀 나머지를 전부 빚 갚는 데 써야 한다. 빚을 갚는 데만 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법원에서 최저생계비로 인정하는 금액은 약 100여만원 정도로 매우 적기 때문에 결국 5년간 빚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정상적인 경제활동도 어렵다.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극히 예외를 제외하고는 변제기간이 3년으로 되어 있고 이마저도 중도에 변제계획을 완화하거나 특별 면책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종결된다”고 말했다.

개인파산은 조건이 더 까다롭다. 우선 최근 6개월 이내 부채가 총 채무의 30%가 넘거나 1년 이내에 50% 이상이라면 파산면제신청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갑자기 빚이 늘었다면 파산 면제를 받기 어렵기 때문에 적어도 6개월에서 1년 정도를 추심 압박에서 견뎌야 파산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 파산 신청이 증가하자 법원이 파산관재인을 선임하라고 지시하는 사례가 늘었다. 파산관재인은 법원 감독 하에 채무자 재산, 면책불허가 사유 등을 조사하고 재산이 있을 경우 이를 환가해 채권자에게 배당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파산관재인 선임비용은 약 150만~300만원에 달한다. 돈이 없어서 파산을 신청한 사람에게는 너무 큰 금액이다. 파산 신청에서 면책까지 걸리는 기간도 약 1년 이상으로 길다. 파산 신청이 받아들여지는 비율, 즉 파산 면책률도 2006년 99%에서 최근 87%까지 후퇴했다.

제 대표는 “개인파산, 개인회생, 워크아웃 제도 등은 사회 안전망으로 작용하기보다는 도덕적 해이라는 잣대로 채무자에게 과도한 죄의식을 부과하고 가혹한 부채 상환을 강요하고 있다”며 “결과적으로 채무자의 회생보다는 채권자의 채권 회수에 더 의미 있는 제도”라고 꼬집었다.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