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종 효과'가 얼굴 헷갈리게 만든다

조선일보
  • 이영완 기자
    입력 2011.08.30 03:13

    케냐 선수 셋이 1·2·3위 했는데… 한국 관중들, 금·은·동 누구인지 구별 못해
    같은 인종보다 다른 인종을 볼 때 얼굴 특징 파악하는 뇌 신호 약해… 지목된 범죄 용의자가 타인종일 경우 목격자의 진술 신빙성 떨어질 수도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첫날 벌어진 여자 마라톤과 여자 1만m 경기에서 케냐 대표팀이 금·은·동메달을 싹쓸이했다. 그런데 분명히 결승선에 1~3위 선수들이 들어오는 장면을 봤는데, 나중에 국기를 들고 경기장을 도는 선수 중에 누가 금메달이고 누가 은메달인지 헷갈렸다는 사람이 많았다. 다른 인종(人種)의 사람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른바 '타인종 효과' 때문이다. 왜 인종이 달라지면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일까. 최근 과학자들이 뇌에서 그 답을 찾았다.

    뇌는 다른 인종의 얼굴엔 무관심

    타인종 효과는 1914년 미 하버드대의 심리학자 구스타프 페인골드(Feingold)가 처음 제시했다. 그는 '미국 형법과 범죄학연구소 저널'에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인에게 모든 아시아인은 똑같아 보이며, 반대로 아시아인에게도 백인은 모두 같은 얼굴로 인식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 원인은 100년 가까이 규명되지 못했다.

    연구에 물꼬가 트인 것은 지난해다. 영국 글래스고대 로버트 칼대라(Caldara) 교수팀은 지난해 11월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백인과 동아시아인 학생 각각 12명에게 백인 또는 동아시아인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N170'이라는 뇌 신호를 측정한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사진은 같은 사람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찍었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두 사람을 찍은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뇌는 같은 사람의 얼굴을 두 번 보는 것처럼 같은 자극을 잇달아 받으면 반응을 덜 한다. 참가자들이 자신과 같은 인종의 사진을 두 번째 볼 때 뇌 신호가 감소했다. 하지만 다른 인종의 사진을 다시 볼 때는 뇌 신호가 줄지 않았다. 즉 자신과 같은 인종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어 또 본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인종의 얼굴은 두 번 보여줘도 두 번 다 처음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말이다.

    N170 신호는 시각 자극을 받고 나서 해당 사물이 어떤 범주에 드는지를 구분하는 반응과 관련된다. 연구진은 "뇌는 다른 인종을 보면 얼굴 특징보다는 어느 인종에 속하는지를 먼저 판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달 미국 노스웨스턴대의 켄 팔러(Paller) 교수팀은 실제로 타인종의 얼굴을 볼 때 'P2'라는 뇌 신호가 약하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P2는 얼굴의 특징을 파악할 때 나타나는 뇌 신호다. 팔러 교수팀의 실험에서 백인 여학생이 백인 남성의 사진을 볼 때는 P2 신호가 증가하지만, 타인종 남성의 사진을 보면 P2 신호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7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1만m 경기에서 1~3위를 휩쓴 케냐 선수들이 경기를 마치고 국기를 든 채 기뻐하고 있다. 누가 1위로 들어온 선수이고, 누가 2·3위인 선수일까? 우리와 다른 인종인 이들의 얼굴을 잘 구분하지 못하는 이유를 뇌 과학자들은‘타인종 효과’로 설명한다. /로이터 뉴시스
    목격자 진술 신빙성 판단에 도움 줄 듯

    타인종 효과 연구는 범죄 수사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페인골드 교수가 '타인종 효과'를 범죄학 전문 저널에 처음 발표한 것도 목격자가 지목한 용의자가 다른 인종일 경우 신빙성이 약하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1984년 미국에선 22세 백인 여학생 제니퍼 톰슨이 흑인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나서 흑인 남성 로널드 코튼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코튼은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하다가 교도소에서 한 흑인 수감자가 자신이 톰슨을 성폭행했다고 말한 것을 들었다. 코튼은 당장 재심을 요청했지만, 이때도 톰슨은 두 수감자 중 코튼을 범인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11년 뒤 DNA 검사에서 진범은 코튼이 교도소에서 만난 흑인 남성임이 밝혀졌다. 뇌의 타인종 효과가 일찍 밝혀졌더라면 11년의 억울한 옥살이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타인종 효과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2003년 영국 서식스대 연구진은 남아프리카 흑인과 영국 백인에게 흑인과 백인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신이 본 얼굴을 기억하는지를 확인했다. 예상대로 모두 같은 인종의 얼굴을 더 잘 구분했지만, 일부 흑인은 백인 얼굴도 정확하게 가려냈다. 이들은 대학에서 백인과 자주 만난 사람들이었다. 결국 진정한 글로벌 시대를 이루려면 다른 인종도 자주 만나서 뇌의 차별까지 없애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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