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그렇게 묵묵하고 듬직하게 저를 챙겨주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가버리시고는 어찌할 바를 몰랐었습니다. 그 와중에 현대는 경영권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분들이 현대를 지켜내고자 노력하시는 모습을 보고 좌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2003년 8월4일,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계동 사옥 집무실에서 몸을 던졌다. 정 회장의 장녀인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는 당시 스물일곱살이었다. 믿고 의지하던 아버지의 죽음은 정 전무의 삶을 180도 바꿔놨다.
정 전무는 몇달 뒤 현대상선 재정부에 대리로 입사한다.
◆ 광고 전문가에서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정지이 전무는 광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대에서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을 연세대 사회과학대학원 신문방송학으로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대학원을 다닐 때 정 전무는 매 수업에 지각이나 결석을 거의 하지 않고 열심히 임했다고 한다. 대학원 시절 정 전무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모르고 만나면 재벌가의 자녀라는 생각이 전혀 안들 정도로 겸손하고 예의를 갖췄다"라고 평가한다.
정 전무의 대학원 석사 논문 제목은 '광고와 퍼블리시티의 시너지 효과 연구'다. 광고와 퍼블리시티를 동시에 사용할 경우에 광고효과의 차이가 어떻게 변할지에 대한 내용이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처음 택한 직장도 외국계 광고회사였다.
하지만 광고 전문가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정 전무를 아버지의 회사로 향하게 했다.
정 전무는 2004년 1월5일 현대상선에 첫 출근한다. 일반 사원으로 첫 발령은 재정부였다. 현대상선은 현대그룹의 핵심 계열사로 해외지사가 많기 때문에 글로벌 마인드를 키우라는 현정은 회장의 추천이 있었다고 한다. 사원으로 입사한 지 1년 만에 정 전무는 대리로 승진했다. 대학원과 외국계 광고회사 근무 경력이 인정을 받았고, 승진 시험에서도 토익부문 1등을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년 뒤에는 과장으로 승진한다. 부서도 재정부에서 회계부로 옮겼다. 이때부터 정 전무는 현대그룹의 후계자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여러 부서를 두루 거치며 후계 교육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런 관측은 반년 뒤 사실로 확인된다. 정 전무는 2006년 3월 그룹내 SI(시스템통합) 업무를 담당하는 현대유엔아이의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룹에 첫 발을 내딛은 지 2년 만에 사원에서 임원으로 승진한 것이다.
◆ 아버지의 사업, 어머니와 함께 동반자로
대북사업은 정주영 명예회장에서부터 이어오는 현대그룹의 숙원이다. 정몽헌 회장도 대북사업에 온 몸을 투신했고, 그 뒤를 이은 현정은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현 회장은 2004년 5월 대북사업을 위해 북한을 방문했다. 리종혁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의 부위원장과 김용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는 자리였다. 정몽헌 회장 사후 대북사업의 진행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리에 정지이 전무도 함께 했다.
이후 정 전무는 현 회장이 북한을 찾을 때마다 옆을 지켰다. 지난 2005년 7월 북한 원산에서 백두산 및 개성 시범관광에 대해 합의할 때도 정 전무는 현 회장과 함께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같은 해 8월 개성 시범관광, 2006년 5월 실시된 내금강 남북한 공동답사에서도 정 전무는 현 회장을 보필했다.
2009년에는 현대아산 근로자 유성진 씨가 북한에 억류되고 금강산 관광이 난관에 부딪힌 상황에서 현 회장과 함께 방북했다. 현 회장은 애초에 2박3일의 일정으로 방북했지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지 못하자 다섯 차례나 일정을 연기했다. 수행원이나 다른 직원도 거의 대동하지 않고 현 회장과 정 전무가 홀홀단신으로 뛰고 있었다. 결국 현 회장과 정 전무는 방북 7일만에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현대그룹을 떠나 막혀있던 남북 대화의 물꼬를 트는 순간이었다.
2009년 8월17일 현 회장과 정 전무는 경기 파주 도라산출입사무소를 통해 돌아왔다. 언론들은 현 회장에게는 '장밋빛 정장의 귀환', 정 전무에게는 '숨은 공신'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 소탈하고 겸손한 성격…경영능력은 아직
정지이 현대유엔아이 전무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 같이 "겸손하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회사 직원들에게 인기도 많다. 소탈하고 항상 호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릴레이 마라톤 대회, 경복궁 돌보기 운동 등 여러 회사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한다.
정 전무는 여러 면에서 보통의 재벌가 딸들과 다르다. 삼성그룹의 이부진, 이서현 자매처럼 각종 화제를 몰고 다니는 일도 없고, 정유경 신세계 부사장이나 이미경 CJ E&M 총괄부회장처럼 그룹 경영에서 큰 목소리를 내지도 않는다.
지난해 12월 정 전무는 강남구 청담동의 한 클럽에서 지인들과 함께 신체장애 어린이 수술비 지원을 위한 자선파티를 열었다. 문제는 무료로 공연을 해줄 밴드를 찾는 일이었다. 재벌가 딸들은 연예인들과 친하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지만, 당시 정 전무는 아는 연예인이 없다며 주위 사람들에게 "맘 좋은 밴드 없느냐"고 수소문했다고 한다. 조용하고 소탈한 정 전무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고 미술관 관장이나 하던 옛날 재벌가 딸들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광고에 관심이 많았고 IT에도 많은 애정을 쏟고 있다. 전무를 맡고 있는 현대유엔아이로 자리를 옮길 때 IT에 대한 관심도 큰 몫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현대그룹도 당시 인사에 대해 "현대유엔아이의 중장기 목표인 디지털컨버전스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참신한 감각과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정 전무가 합류한 이후 현대유엔아이는 급성장했다. 2005년 만들어진 현대유엔아이는 첫해 매출이 103억원에 머물렀다. 하지만 정 전무가 본격적으로 경영에 참여한 뒤 2008년에는 매출액이 854억원으로 늘었다. 지난해에는 매출 1000억원을 넘어섰다.
다만 경영 능력을 인정받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평가가 많다. 현대유엔아이 매출에서 현대그룹 계열사가 차지하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현 회장의 방북을 보좌한 것 외에 아직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기도 하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 등 다른 재계 뉴리더들보다 젊기는 하지만 이미 경쟁을 펼치고 있기 때문에 나이가 변명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 NK(North Korea) 보다 높은 MK(정몽구)의 벽
2000년 3월27일 오전 서울 계동 현대그룹 사옥에 정주영 명예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명예회장은 사장단이 모여 있는 회의실로 들어가 "경영자협의회 의장(그룹 회장)을 정몽헌 단독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정몽구 회장이 쫓겨나는 순간이었다. 이때부터 현정은 회장과 현대가(家) 사람들의 치열한 다툼이 시작됐다.
2004년초 KCC는 현대그룹의 지주회사격인 현대엘리베이터 지분을 취득해 M&A를 시도했다. KCC 정상영 명예회장은 정씨가 아닌 며느리가 그룹을 이끄는 것을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이후에도 현대그룹과 범(凡) 현대가의 싸움은 잊을만 하면 계속됐다. 지난해부터 계속된 현대건설 인수전도 양측의 자존심을 걸고 진행됐다. 결국 정몽구 회장이 승리를 거두고 정 회장은 11년 만에 계동사옥에 복귀했다.
정 전무의 가장 큰 벽은 경영 수업이나 북한 문제가 아니라 큰 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특히 현대건설 인수전의 패배가 정 전무에게 치명적이라는 분석도 있다. 앞으로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이 현대건설까지 맡게 되면 정 전무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대북사업을 갖고 있지만 현대건설 인수 실패로 현대라는 이름의 적통성을 정몽구 회장에 내준 것도 아프다.
정 전무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착하다", "겸손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착하고 겸손한 것만으로 살아남을 수는 없다. 큰아버지와 사촌오빠를 넘어서기 위해 정 전무가 더 발빠르게 움직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