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모바일이다"

조선일보
  • 김희섭 기자
    입력 2011.03.07 03:00

    세계 최대 PC회사 HP 아포테커 회장 방한 인터뷰
    "스마트폰·태블릿PC 등 출발은 비록 늦었지만 충분히 뒤집을 수 있어
    조직 근본부터 뜯어고쳐 활력이 넘치게 만들 것… 내 피엔 '푸른 잉크' 흘러"

    세계 최대의 PC·프린터 회사인 HP가 대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스마트폰과 태블릿PC 등 새롭게 각광받는 모바일 분야에서도 선두권에 진입하겠다고 도전에 나선 것이다.

    HP는 2010년까지만 해도 IT분야 세계 최대기업으로 꼽혔으나, 최근엔 덩치만 크고 움직임이 굼뜬 '공룡기업'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런 HP의 전면 개혁에 나선 이가 작년 11월 전격 영입된 레오 아포테커(Apotheker·58) 회장(CEO)이다.

    미국 IT업계의 상징이었던 HP에 독일의 기업용 소프트웨어 회사 SAP 회장 출신인 아포테커를 영입한 것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는 실리콘밸리의 '터줏대감'인 HP에 부임한 첫 독일인 CEO이기도 하다.

    아포테커 회장은 "HP에는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며 "조직과 사업구조, 임원진 모두를 확 뜯어고치겠다"고 말했다.

    SAP에서 22년을 근무했던 그는 지난 4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제 내 혈관에는 푸른 잉크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다. '푸른 잉크'란 HP의 푸른색 로고와 대표적 제품인 잉크젯 프린터를 의미한다.

    "HP가 결정하는 그것이 곧 트렌드가 된다"

    HP는 수년간 방대한 사업분야에서 돈은 벌었지만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지는 못했다. 전임 CEO인 마크 허드가 성추문으로 물러나면서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다. 세상의 관심은 '혁신' 이미지의 트위터·구글·아이폰·페이스북 등 이른바 'TGIF'로 옮겨갔다.

    아포테커 회장은 "TGIF라는 말은 처음 듣는데 그런 서비스도 우리의 핵심기술과 장비가 없다면 운영될 수 없다"며 "인터넷에서 MP3 음악파일을 사는 것도, 신용카드 결제를 할 때도 HP 기술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인식하는 것과 실체는 달라요." HP는 요란하게 떠들지 않고, 소리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모바일 분야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얘기한다. "사업은 단거리 경주가 아니라 마라톤이에요." 그는 "출발은 늦었지만 거대한 스케일을 바탕으로 충분히 선두를 따라잡을 수 있다"면서 "HP가 결정하면 그것이 곧 업계 트렌드가 된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HP는 지난달 스마트폰과 태블릿PC 같은 모바일 기기를 작동시키는 핵심 운영체제(OS)로 '웹OS'라는 것을 발표했다. 애플 아이폰과 구글 안드로이드가 양분하고 있는 모바일OS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이 OS를 내장한 스마트폰도 내놓았다. 아포테커 회장은 "웹OS는 HP 제품에만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회사들도 쓸 수 있도록 개방하겠다"며 "안드로이드를 제치고 업계 표준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사람·조직·문화 다 뜯어고치겠다"

    HP는 실리콘밸리의 자유로운 벤처문화를 만든 회사다. 복장이나 근무시간도 제각각이지만 그 속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이 계속 솟아나왔다.

    하지만 아포테커 회장은 달랐다. 그는 말쑥한 정장에 넥타이 차림으로 인터뷰 장소에 나타났다.

    월가의 금융인 같은 모습이었다. 동석한 HP 간부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옷차림만이 아니었다. 그는 최근 이사회 멤버 5명을 교체했다. 회사 매출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업사업 부문도 2개로 쪼개 서로 경쟁을 시키기로 했다. 아포테커 회장은 "조직에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면서 "변화가 필요하면 즉시 해야 한다. 왜 기다리고 천천히 하느냐"고 말한다.

    "HP의 자유로운 기업문화가 달라지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포테커 회장은 "무조건 옛날이 편하고 좋았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기도 없었던 옛날이 뭐가 좋았느냐"고 반문했다. "가족처럼 '오냐오냐' 하면서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건 HP 방식(HP way)이 아니에요."

    그는 "모든 기업은 문화가 있지만 그게 고정불변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아포테커 회장은 "우리는 170개국에서 사업을 하고, 인도에만 6만명의 직원이 있다"면서 "다양한 사람과 문화가 서로 섞이면서 변해가는 게 우리의 갈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톱다운 방식으로 독재를 하는 건 아니다"면서 "모든 걸 혼자 하겠다는 건 오만한 생각이고, 서로 소통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정면대결하는 사업도 많아질 것"

    아포테커 회장의 아들인 마티유 아포테커는 작년 9월 삼성경제연구소 미래전략실에 입사했다. 글로벌 인재들이 모여 삼성그룹의 비전과 전략을 짜는 핵심조직이다. "아들이 삼성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느냐"고 묻자 아포테커 회장은 "가족끼리 비즈니스 얘기는 하지 않는다"고 웃어넘겼다.

    방한기간 중 삼성전자 등 주요 파트너사와 협력을 논의했다. 아포테커 회장은 "삼성과 HP는 오랫동안 서로 부품을 사고파는 좋은 파트너"라면서도 "사업 포트폴리오가 비슷해 앞으로는 사업에서 맞부딪히는 일도 더 많아질 것"이라고 경쟁의식을 내비쳤다.

    그는 "앞으로 사업차 한국에 자주 올 텐데 한국지사 임직원들이 피곤할지도 모르겠다"면서 한국 사업을 확대할 계획을 밝혔다. 그러자 한국HP의 스티븐 길(Gill) 사장은 "절대 아니다. 회장께서 농담하는 것"이라고 정색하며 말했다. 기강이 바짝 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HP 문화는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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