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연(58) 한화그룹 회장은 11일 “대우조선해양이 다시 매물로 나오더라도 재인수에 나설 계획은 없다”며 “정이 딱 떨어졌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신성장 동력사업과 관련, "태양광 발전 사업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며 "관련 해외 기업을 인수하는 방안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고급 브랜드) 아울렛 사업도 검토 중"이라며 "해외업체와 제휴하는 것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조선일보와 조선경제i가 함께 만드는 '조선비즈닷컴' 창간 기념 특별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1981년 한화그룹 회장 취임 이후 언론과 공식 인터뷰는 이것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인터뷰는 서울 중구 장교동 한화빌딩 27층 접견실과 28층 임직원 식당에서 3시간 동안 진행됐다.
-지난달 미국 동부로 가서 직접 인재 채용 설명회를 가진 것으로 안다. 대기업 총수가 해외 나가서 직접 채용 설명회를 갖는 것은 이례적인데, 어떤 이유에선가.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또 신사업과 해외사업을 추진하려고 할 때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이 인적 자산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요즘 내가 하고 다니는 중요한 일이 쇼핑이다. '인재 쇼핑'이고, '신성장 동력 사업 쇼핑'이다. 내가 회장이 된 지 30년이 됐다. 강산이 세 번 바뀌었고, 그 사이 여섯 분의 대통령을 모셨다.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우리 조직과 임직원에게도 그에 걸맞는 변화를 강조했지만 변화라는 게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해외 인재를 수혈하려고 하는 것이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해외 인재도 뽑을 계획이다. 우리가 베트남에 진출하려면 한국에 유학을 와 있는 베트남 학생들을 채용해서 교육을 시킨 뒤 사업을 맡기면 된다. 한국인 직원에게 새로 베트남어와 베트남 문화를 교육시켜서 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국내 인재 채용에도 획기적인 접근법을 생각 중이다. 미국에선 전국 고등학생에게 과학경시대회를 열어 1등에게 10만 달러를 주고 있다. 그 주제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우주여행을 하려면 비행선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라는 식의 영화에나 나올 법한 내용이다. 우리는 대학생을 대상으로 더 높은 액수의 상금을 걸어놓고 그런 경시대회를 개최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
-미국에서 유학도 하셨고 한미재계회의 회장도 맡으셨다. 회장님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글로벌화가 돼 있지만 한화의 사업구조는 국내쪽 비중이 높다. 신성장동력을 해외에서 찾으려는 계획이 있나.
"태양광 사업을 비롯한 대체에너지 사업, 자원개발, 우주항공부품 분야에서 해외사업 기회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천안함 사태를 겪으면서 생각한 것은 방위산업 분야도 좀 더 강화할 생각이다. 금융은 우선 국내에서 좀 더 깊이 있고 넓게 사업을 하면서 해외로 넓혀가겠다는 계획이다. 대한생명은 베트남에 이미 진출해 있다. 시작 단계이지만 출발은 좋다."
-태양광 사업 등을 위해 해외 기업을 인수할 계획은.
"그것도 배제하지 않는다. 남유럽 상황 때문에 현재 세계 시장상황이 좋지 않다. 그래서 남의 돈을 꿔가면서 하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가진 돈으로는 진출할 계획이 있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추진하다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포기했다. 대우조선이 다시 매물로 나온다면 인수를 재시도 할 계획이 있나.
"정이 딱 떨어졌다."
-대우조선 인수전에서는 포스코와 GS 같은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다. 한화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끝까지 추진했다. 이유가 있었나.
"나는 올림픽에서 복싱협회 일을 20년 가까이 관여했다. '올림픽은 참여에 의의가 있다'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참가에 의의가 있다면 관광을 가야한다. 참가하면 이겨야 한다. 전쟁에서는 이겨야 한다. 뭐든지 지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우조선해양 아닌 국내 다른 기업 인수할 계획은.
"주인 없이 10년 동안 있있던 회사를 인수하는 것은 새로 설립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다. 그런 회사를 고치기 위해 투입하는 시간과 노력보다는 차라리 외국에 있는 회사를 인수하는 게 더 좋지 않나는 생각도 한다."
-자금은 충분히 확보하고 있는가.
"우리 분수에 맞게 할 것이다."
-수년 전부터 한화갤러리아 매각설이 나오고 있다. 롯데, 신세계가 압구정동 갤러리아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이야기가 많다.
"매각 계획이 전혀 없다. 갤러리아는 재미 있는 회사다. 규모는 롯데와 신세계보다 턱없이 작은데, 불경기일 때 오히려 매출이 올라간다. 참 신기한 회사다. 잘 키워서 상장까지도 해볼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한다. 양적인 경쟁보다는 질적인 경쟁을 할 것이다."
-최근 갤러리아가 세계적인 패션 명품 개발을 위해 이탈리아에 수공 장인들로 구성된 명장 생산기지 개발을 검토 중이라고 들었다. 명품 브랜드 사업에 진출할 계획이 있나.
"이탈리아 현지에 사무실 하나를 차려놓았다. 명품 브랜드는 아닐지라도 그와 꼭 같은 수준으로 만들어주는 업체가 있다고 하더라. 그런 업체를 몇 군데 정해서 우리만의 브랜드를 만들 계획을 검토 중이다. 우리가 그런 업체를 직접 인수하지는 않더라도 제휴관계를 맺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갤러리아'라는 고급 백화점을 갖고 있지만, 신세계 아울렛처럼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아울렛 사업에 진출할 계획은?
"검토 중이다. 여러 군데 보고 있다. 해외업체와 제휴하는 것도 검토하는 안 중의 하나다. 솔직히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어서 김승연 회장은 대한생명 인수에서부터 상장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털어놨다.
그는 "대한생명은 국민 세금으로 들어간 공적 자금을 상장을 통해 회수한 첫 사례"라며 "당시 IMF 시기와 겹쳐 집 문서와 경영 포기 각서까지 내놓는 상황이었지만 뭔가 강력한 추진제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대한 생명 인수를 밀여 붙였다"고 말했다.
입찰 당시 김승연 회장이 손수 입찰 제안서를 들고 금감위를 찾은 것은 유명한 일화다.
김 회장은 "앞으로 금융업 부문 글로벌 진출도 늘릴 것"이라며 "일단은 우리와 문화가 비슷한 동남아, 중국 지역을 공략하고 그 후 카우보이처럼 점점 서쪽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1981년 29세에 한화그룹 회장이 된 김 회장은 30년 동안 한화를 매출 1조원의 회사에서 29조원의 회사로 키워냈다. 자산규모도 7500여억원에서 86조 5000억원으로 뛰었다. 김 회장은 그 비결로 "기업의 생존만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예금보험공사가 가지고 있는 대한생명 지분 24.75%의 보호 예수가 오는 9월이면 풀리는 것으로 안다. 그 지분을 매입할 계획이 있는가?
"대한생명 매각 당시 계속 유찰돼 3차 입찰까지 갔다. 당시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모 투자회사 고문 자격으로 와서 '1억 달러를 주면 대한생명을 인수하겠다'고 제의했다고 한다. (당시 부시 전 대통령은 워싱턴 종합투자회사인 칼라일그룹의 서울사무소 개소일에 맞춰 이 회사 아시아담당 선임고문 자격으로 한국에 들렀다.)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입찰 때는 내가 직접 입찰 제안서를 들고 금감위를 찾았다. 우리 말고는 아무도 인수하겠다는 사람이 없어 두차례나 유찰되고 3차 입찰에서도 우리밖에 인수 희망자가 없었다.
3차 입찰에서 우리가 써낸 가격이 내정가의 두 배 였다. 그런데도 정치적인 특혜를 받았다고 7년간 각종 시비에 휘말렸다. 심지어 이 일로 국제 사법 중재위까지 갔다. 그래도 대한생명에 대해 이런저런 말이 많았다.
지난 3월 대한생명 상장 당시 우리사주에 98%에 이르는 사원들이 동참했다. 그 회사 사정은 직원들이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사원들이 자기 연봉의 두 배가 되는 액수로 공모에 참여했다는 것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 아니었겠는가.
이번에 해외 인재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는 것도 바로 실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대한생명을 인수할 당시 외국 투자가들 중 일부가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우리 자체적으로 시장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직접 글로벌 인사들을 만나 그들을 설득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대한생명 상장 후 한 때 주가가 9000원대를 넘어섰다. 현재 한화그룹은 대한생명 지분을 50% 넘게 보유하고 있고, 경영권을 행사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에 예보지분을 추가로 매수할 계획은 없다.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대한생명 상장은 공적 자금을 상장을 통해 멋지게 회수한 첫 케이스다. 국민 세금이 아주 잘 쓰인 것이다. 그런데 특혜를 받았다고 하는데 정말 말이 안된다."
-대한생명의 명칭도 바뀌는가? 그룹의 이름을 따 한화생명으로 바꾸게 되나?
"그렇다. 이사회 승인 거쳐서 6월 중순 쯤 한화생명으로 바꿀 계획이다."
-대한생명의 상장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삼성생명에 비해 자산구조나 재무 상태를 비교했을 때 상장 가격인 8200원은 싼 것 아닌가라는 견해가 있다.
"그래서 불만이다. 대한생명은 과거의 손실을 채워나가며 지난 8년간 나름대로 내실을 다져왔다. 앞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도 크다. 며칠전 교보생명의 신창재 회장을 만났다. 신 회장과 이제 같은 영역에서 경쟁하게 된 셈인데 '사업을 과거 세대와 다르게 같이 해 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고 했다. 서로 윈-윈할 수 있는 길이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본다."
-그룹 전체 매출에서 금융 계열사 매출이 약 18조원으로 절반이 넘는다. 예금보험공사가 대한생명에서 손을 떼면 대한생명과 한화증권, 한화손해보험을 아우르는 금융지주회사를 설립할 계획이 있는가?
"아직까지 검토 안 하고 있다. 일단 대한생명의 이름부터 바꾼다. 그 다음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다."
-금융 업종에서 앞으로 한화가 새로 진출하거나 더 키울 분야가 있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을 좀 더 키우려고 한다. 자산운용 분야를 키울 것이다. 글로벌 진출은 점진적으로 늘릴것이다. 외국 생보사가 한국에서 잘 안되는게 바로 문화의 차이 때문이다. 우리가 금융업 부문에서 해외에 진출할 때 비슷한 문화의 중국, 동남아부터 공략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동쪽을 공략한 후 '카우보이'처럼 점점 서쪽으로 갈 계획이다."
-세종시에도 태양광 사업 연구ㆍ개발센터와 생산 라인 투자 계획도 발표했는데, 현재로선 착공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세종시 계획 추진이 어려우면 다른 대안이 있는가?
"세종시에 연구시설과 생산 기지를 같이 세우려고 했다. 기존 생산하던 제품들도 자꾸 변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기존에 생산하던 PVC도 쇠보다 강하면서 가벼운 쪽으로 개발해야 하는데 이런걸 연구하고 생산하는 기지로 고려하고 있었다. 또 태양광 전지를 만드는 부지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세종시가 바뀔지 아무도 모른다. 정치적으로 싸우느라 늦춰지니 기업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최근 큰 아들인 김동관 차장이 비서실에서 근무하는 등 본격적인 경영 수업이 시작됐다는 견해가 있다. 평소 경영 승계구도에 대한 철학은?
"선친의 유지 중 하나가 '그룹을 쪼개지 말라'는 것이다. 그룹의 특징이 여러 회사가 엉켜있어서 글로벌 경쟁력이 생기는 것이지 따로 놀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변화의 시기에 살고 있다. 정부와 기업,국가와 국가간 관계도 변하고 있다. 이 때까지 미국 중심이었던 글로벌 경제 구조도 변할 것이라 생각한다. 나는 특기도 없고 취미도 없고 오로지 천직으로 30년간 승진한번 못해보고 회장으로만 살아왔다. 자나깨나 기업 생각 뿐이었다. 잠꼬대에서도 일얘기를 할 정도로 일에 매진했다. 솔직히 얘기해서 사랑하는 아들들에게 큰 책임을 물려 준다는 것도 좋은 것 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나는 현재 남들보다 능력이 있고 그룹을 잘 이끌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다. 아무래도 내 자식들이 나와 닮은 유전자를 많이 타고 났을 테니 유리하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그 동안 30년간 일하며 얻은 것은 뭐고 잃은 것은 뭔지 생각해 봤다. 잃은 것은 청춘이고 얻은 것은 기업을 키운 것과 아들 셋이라고 생각한다."
-1981년, 29세나이에 회장이 되셨다. 갑자기 물려받아 참 막막했을 것 같다.
"회사에 들어와서 3년 사우디아라비아 등 공사 현장을 다니고 있는데 선친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버님이 병석에 그냥 누워 있을 때만 해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돌아가시고 나니 장지 결정도 안된 상태에서 최측근, 믿는 사람들부터 배신하고 등을 돌리더라. 그 때 많은것 배웠다.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룹을 물려받은 뒤로 자산, 매출, 순이익이 몇십~몇백배로 늘었다. 회사를 키운 비결과 원칙이 있다면?
"첫째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을 했다. 특히 대한생명 인수 때는 더 심했다. IMF 위기 당시 집문서는 물론 경영권 포기 각서까지 썼다. 내가 집문서까지 내놓고 직원들을 더 흐트려놓는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하지만 강하게 마음을 먹고 뭔가 할꺼면 화끈하게 하자고 생각했다. 그러다 대한생명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봐도 당시 대한생명의 상황은 너무 부실했다. 당시 직원 안정이 1순위였다. 잘하면 희망이 있다고 희망을 줬다. 상장 당시 우리 사주조합에서 98%가 청약을 했다. 투자를 하면 돈 벌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7년 간의 성과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이어서 "부실 투성이던 대한생명보험을 경영 정상화로 이끌고 규모를 키워 상장까지 시킨 것이 가장 큰 보람"이라며 "정부가 공적자금까지 회수하도록 했는데, 지금껏 정부가 공적자금을 회수한 기업은 대한생명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회장은 "하지만 삼성생명과 비교해 볼경우 대한생명의 현 주가는 지나치게 저평가 돼있다"며 "적어도 1만2000원은 돼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 "그동안 정부가 잡고있었던 7년간의 굴레를 벗어났으니 이제 훨씬 더 경영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며 "곧 한화생명으로 사명도 바뀔 예정인데, 앞으로 주가도 재평가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대한생명 공모주 청약에 우리사주조합 청약률이 상당히 높았다.
"이번 공모 때 우리사주조합이 98%의 청약률을 기록했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직원이지 않겠나. 그들이 자신의 연봉 두 배 이상을 들여 청약에 참여했다는 것은 회사 가치를 그만큼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직원들에게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대한생명의 적정 주가는 얼마로 보나.
"1만2000~1만3000원은 가야 한다고 본다. 내가 확신하는 건 7년 동안 온갖 법적인 문제로 뒷다리가 잡혀 있었는데, 이제는 경영에 전념할 수 있는 상황이다. 훨씬 더 큰 발전이 있을 것이다. 우리 직원들에게 고맙게 생각한다."
-지금까지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1981년 선친이 돌아가셨을 때와 1998년 IMF 외환위기 당시가 가장 힘들었다. 하루에 수천억씩을 메워야 했고 사나흘 연속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렇게 밤을 샌 후 누군가와 얘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다고 하더라. 보통 사람들은 없던 것을 얻게 되면 포만감이 생긴다. 반대로 있던 것이 없어지면 얼마나 허무하겠나. 내가 그랬다. 외환위기 때는 집문서까지 내놓았고 경영권 포기각서까지 썼다."
-선대 회장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갑자기 그룹 경영을 책임져야했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선친은 이리 폭발사고가 났을 때 '개인재산을 모두 헌납하겠다'고 발히고 90억원을 사회에 헌납했다. 90억원을 헌납하고 내가 물려받았기 때문에 사실은 마이너스 상태에서 물려받았다. 그래서 선친이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울 겨를조차 없었다. '죽기 살기로 3년만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해볼만 하면 계속하고, 아니면 손을 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3년 정도 하니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더라. 그래서 3년 뒤 어느 비오는 날 선친 묘소로 가서 '어려웠던 3년이지만 해보겠습니다'고 신고식을 했다."
-대우조선해양을 인수할 때와 포기할 때 잘 드러났지만, 회장님은 '나를 믿고 따르라'는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경영스타일을 보여주셨다.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과 참모들이 그런 점 때문에 회장님께 말을 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대로 회장님이 최종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지기 때문에 편하다는 사람도 있다. 스스로는 어떻다고 생각하나.
"두 가지가 다 맞을 것이다.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포기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잘못 먹었다가는 그룹 전체에까지 영향이 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솔직히 전문경영인은 그런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3000억원이 이미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사실 리먼브러더스 사태는 경제적인 천재지변에 가깝다. 그런 사태가 터지고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이 올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시대 변화를 주로 느끼는가.
"작년부터 '세대가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최근 트위터라는 게 유행이더라. 그래서 트위터를 잘하는 여직원에게 잠깐 올라오라고 해서 어떻게 하는지 봤다. 여직원이 트위터에 '나 지금 회장하고 있어'라고 올렸더니 상대방에서 '어떤회장?' 이렇게 답이 오더라. 여직원이 '우리 회장님' 이렇게 치니까 또 바로 '웃기지마!'라는 글이 올라오더라.(웃음) 상대방이 못 믿으니까 여직원이 나보고 직접 트위터에 글을 올려보라고 하더라. 그때 내가 그랬다. '내가 직접 올릴 줄 알면 당신을 왜 불렀겠냐'고. 세대가 정말 많이 변했다."
-학생들에게 창의성 개발을 위해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과학경진대회를 계획한다고 했는데,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것이 있다면.
"첫째가 교육이라고 본다. 학생들은 하얀 종이에다 미래를 스케치해나가는 시기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입시와 내신성적에 메달리면서 창의성을 개발할 여지가 없다. 또 학교에서는 전교조 교사들이 편향된 교육을 시키는 경우도 있다.
-부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는데, 어떤 분으로 기억하나.
"어렸을 때 아버지를 매우 어려워 했다. 내가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때 가끔 오시면 같이 자자고 하시더라. 그럼 구석에서 혹시 아버지 잠을 깨우지나 않을까 조심해서 자고 있으면 '자냐?'고 종종 물으셨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회사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이야기를 죽 듣고 자랐기 때문에 한국화약에 대해서는 나만큼 더 잘 아는 사람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남자로서 참 멋있는 분이었다."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신성장동력사업에 대해서이다. 5년, 10년 뒤에 얼마나 급속한 변화가 올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과거에는 탈 것이나 먹을 것, 가전 등 미국제가 가장 좋았다. 어느날 그것이 일본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과 중국도 제조업 강국이다. 한국은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까. 계속 제조업으로 가야할까, 아니면 금융서비스를 발전시켜야 할까.
"밴쿠버올림픽 때 느꼈지만 한국 사람은 남들이 따라오지 못할만큼 우수한 면을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제조업 중 상당 부분은 중국과 인도도 따라올 것이다. 금융은 미래산업이 될 수 있다. 올림픽에서 우리 젊은이들이 보여주었듯이 '올림픽이 별거야' 이런 정신으로 달려들면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쉬면서도 회사 일 생각을 하지 않을 때가 없다고 했는데, 빌 게이츠는 일주일 동안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고 지내기도 한다. 휴가는 어떻게 보내고, 개인적인 재테크는 어떻게 하나.
"재테크는 사업하는 것이 전부다. 매출이 는다고 내 생활에 변화가 있는 것 아니다. 개인 재테크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휴가는 그렇더라. 일을 잊으려 해도 조금 한가해졌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회사 일이 생각난다. 사업하는 게 직업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더 욕심을 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생존경쟁이라서 그렇다."
-전문경영인이라면 내리기 힘든 결정을 내리는 경우도 많다고 했는데, 일각에서는 그런 경영 스타일을 '제왕적 경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처음 사업을 물려받았을 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은 현재 대부분 돌아가셨다. 그분들이 돌아가실 때 보니 모두 빈손으로 가더라. 개인이 챙길 수 있는 것은 한도가 있다. 하지만 그룹 총수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일종의 책임감 때문이다. 나도 이 일을 하면서 도저히 못 쫓아가겠다 싶을 때는 손을 떼든지, 전문가를 시키든지 해야지 않겠나."
-이리 폭발사고로 마이너스인 상태에서 기업을 시작했고, IMF 때는 알짜 회사도 팔았다. 집문서까지 내놓고 각서까지 썼다고 했다. 회사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도 많았다. 기업은 왜 하느냐.
“내 천직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29세인 직원들을 봤을 때 불안스럽다. 내가 29세에 회장 됐을 때 주변 사람들은 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했다. 기업 외에 잡스러운 것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친구도 선배도, 후배도 없었다. 내가 생각 하나, 판단 하나 잘못하면 나뿐만 아니라 직원들까지 문제가 된다는 걸 알았다. IMF 때 집문서까지 내놓은 경험이 있지 않나. 그래서 우리 임직원들에게 희망을 줘야지, 허탈감을 주면 안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