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리비아 제2의 도시 벵가지. 트리폴리(리비아 수도)에서 승객 80여명을 태운 작은 비행기가 벵가지 국제공항의 활주로에 '끼이익~' 소리를 내며 착륙하자 승객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딱히 위험했던 순간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승객들은 안전하게 날아온 것에 아주 흡족해하는 분위기였다.
한국의 시골 시외버스 터미널 같은 공항청사를 나서자 도로 곳곳에 세워진 간판에는 곱슬머리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낯익은 얼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리비아의 국가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사진이다. 마중 나온 대우건설 리비아 건설현장의 최인엽 차장에게 "카다피가 국민들 사이에 정말 인기가 좋으냐"고 물었더니 "함부로 '카다피'라는 말을 꺼내선 안된다"고 주의를 줬다. 그는 "우리끼리 얘기할 때는 '가 선생님'이라고 한다"고 귀띔해 줬다.
◆경쟁 치열한 중동 피해 북아프리카 리비아 개척
모기업인 금호아시아나의 자금난으로 산업은행으로의 매각이 확정된 상황이지만, 낯선 리비아 땅의 대우건설은 여전히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최 차장은 "서울 소식이 궁금하긴 하지만 요즘 같은 시절엔 해외현장에서 일에 파묻혀 있는 게 마음 편안하다"고 말했다.
공항에서 빠져나와 송전탑이 줄지어 서 있는 황량한 벌판을 자동차로 달리기를 30여분. 지중해 바닷가와 접한 도시 외곽지역에 거대한 굴뚝과 철근 구조물, 크레인이 우뚝 솟아 있는 건설현장이 나타났다. 대우건설이 2008년 1월 리비아 전력청으로부터 수주해 건설 중인 벵가지 복합발전소 건설현장이다.
건설 중장비가 내지르는 소음이 가득찬 현장에는 어른 허벅지 굵기의 전선이 곳곳에 쌓여 있고, 흰색 안전모를 쓰고 설계도면을 든 한국인 감독관들이 현장 근로자들에게 작업 지시를 하고 있었다. 핵심 부품인 터빈을 막 설치한 뒤여서 철근 골조로 된 발전소 외벽 공사에 작업 속도를 내고 있었다. 이곳에 근무하는 근로자는 모두 1000여명가량. 대우건설 직원 50여명은 대부분 현장 감독과 엔지니어들이고, 나머지는 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근로자들이다. 현장 소장인 허경필 대우건설 상무는 "지금 건설 중인 발전소뿐 아니라 리비아에 있는 건물 중에 제법 규모가 크다 싶은 것은 모두 대우건설이 지었다"고 말했다.
대우건설이 리비아에 진출한 것은 중동 붐이 한창 일던 1970년대 중반. 당시만 해도 신생 건설사였던 대우건설은 경쟁이 치열한 중동을 피해 낯선 북아프리카의 리비아를 개척했다. 리비아는 사막이 대부분이지만 국토 면적(176만㎢)은 한반도의 8배에 이를 정도로 크고 북아프리카의 대표적인 산유국이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안정돼 있어 발전 가능성도 풍부한 지역이었다. 초기엔 토목공사 위주였지만 지금은 발전소·호텔 등 고부가가치 공사를 주로 수주하고 있다.
◆대한민국보다 대우건설이 더 유명
대우건설이 리비아에서 처음 수주한 공사는 1억달러 규모의 가리우니스 의과대학 신축 공사(1978년). 이듬해에는 리비아 사막 한복판에 있는 우조비행장 공사를 수주했다. 이탈리아 업체가 공사하다 포기하고 떠나버린 난공사였다. 한낮 온도가 40~50도를 오르내리는 사막 한가운데에서 야영생활을 하면서 700㎞ 길이의 공사용 도로를 깔고, 우물까지 파서 공사를 끝냈다. 최규명 대우건설 상무는 "당시엔 딱히 첨단 기술이라고 내세울 것도 없는 처지여서 힘든 공사라고 마다할 수는 없었다"며 "낯선 아프리카에서 살아남으려면 이곳 사람들이 불가능하다는 일을 '죽기 살기'로 열심히 해 완성해 보여 주는 것뿐이었다"고 말했다.
우조비행장 공사로 카다피의 신임을 얻은 대우건설은 이후 아파트·정부청사·공항·학교·발전소·호텔·병원 등 리비아에서 발주되는 토목·건축물·플랜트 등 웬만한 공사를 모두 '싹쓸이'로 수주했다.
지금까지 대우건설이 리비아에서 수주한 공사 금액은 120억달러(약 14조원). 덕분에 리비아에선 대한민국보다 대우건설이라는 브랜드가 더 유명하다.
◆해외건설 시장 다변화하려면 아프리카 시장 개척해야
해외건설 수주가 늘어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족과 떨어져 현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리비아 사막의 고독한 생활은 숙명이다. 이곳엔 술집도, 영화관도, 제대로 된 쇼핑센터도 없다.
이슬람 국가여서 건설현장의 필수품인 삼겹살과 소주는 금지 품목이다. 하지만 최근엔 리비아 정부도 외국인들이 집에서 '알아서' 조용히 술을 마시는 것은 눈감아 준다. 이곳에선 현장 직원들은 포도를 발효시켜 만드는 일종의 꼬냑인 '싸데기'(아랍어로 친구라는 뜻)를 만들어 마신다.
리비아 근무만 16년째인 김종일(51·총무 담당) 주임은 "삼겹살에 소주만은 못하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양고기에 싸데기 한잔이면 호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대한민국이 아프리카 해외건설 현장에서 수주한 공사 금액은 12억달러가량. 중동에서 수주한 금액(357억달러)에는 비할 바가 아니지만, 지역별로는 중동 다음으로 큰 해외건설 시장이다. 남기혁 대우건설 전무는 "아프리카 해외건설 시장에 강점이 있는 대우건설의 노하우를 살려 앞으로 나이지리아·앙골라 등에서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