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천안시 성환읍 수향리. 천안연암대학 옆에 자리한 수향농장 주인은 LG그룹 구자경(具滋暻·80) 명예회장이다. 공장 한편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중소기업 사장 사무실보다 검소해 보였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절전하려고 꺼두었던 에어컨의 전원 스위치를 ‘서울에서 내려온 손님’을 위해 올렸다. “이렇게 멀리까지 뭐하러 왔어요. 모처럼 왔으니 농장 구경이나 하시고 가세요.”
자리에 앉자마자 사무실 한편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각종 된장 샘플을 가리키며, "제대로 된 된장 한번 만들려고 1년째 연구 중"이라며 "연말이면 진짜 한국 된장 맛을 한번 보여주겠다"고 자랑했다.
"어머니의 된장 맛이 그리웠어요. 된장은 숙성 기간에 따라 맛이 달라요. 제가 만든 된장은 숙성 기간만 1년6개월짜리입니다. 수향 만두를 만든 것도 어머니가 만들어 준 만두를 먹고 싶어서지요. 이건 내다 팔 겁니다. 좋은 걸 혼자만 먹어서는 안 되지요."
된장과 만두의 이름은 이 지역 지명을 따서 '수향 된장·만두'로 지었다. "만두 속에는 돼지고기 중에서 가장 맛있다는 붉은돼지, 흑돼지 고기와 정성껏 야채만 넣었어요."
인터뷰 중 점심시간이 되자 농장 옆에 위치한 구 명예회장의 조그만 사택으로 자리를 옮겼다. 메뉴는 수향 군만두와 베이컨을 넣고 피자로 감싼 감자, 마지막에는 가쓰오부시(가다랑어포) 국물에 담가 먹는 찬 우동이 나왔다. 모두 구 명예회장이 직접 개발한 음식이다.
"수향 농장에 바로 붙어있는 천안연암대학에 '예빈관'을 개설할 계획입니다. 예빈관에 레스토랑을 만들어서 외식산업과 학생들이 돌아가며 음식을 직접 만들고 서빙하는 실습을 할 겁니다. 실습을 해봐야지 직접 식당을 열어도 실패할 확률이 적지요."
점심 후 구 명예회장의 자가용(골프장에서 쓰는 전기 카트)에 올라타고 수향농장과 천안연암대학 실습장을 점검하는 오후 일과에 따라나섰다.
분재농장에서 시작, 식물원, 채소밭, 과수원을 둘러보고 냄새 나는 돼지우리, 닭장, 실험용 동물 축사, 된장 공장, 만두공장을 찾아 현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꼼꼼히 살핀다. 의문이 생기면 즉시 담당자를 불러 물어본다.
구 명예회장은 그룹 총수직에서 내려올 때 욕심이나 미련은 없었을까?
"회장으로 25년 일해 보니 하도 시달려서 모든 게 싫었어요. 매주 월요일 서울 여의도 사옥에 출근하지만 복지재단 보고만 받지요. 오후가 되면 농장으로 돌아옵니다. 집사람은 농장에만 있으니 너무 심심하다며 서울로 올라갔어요."
명예회장의 아호는 상남(上南). 구씨 집안의 고향인 진양군 지수면에 있는 다리인 상남교(上南橋)에서 따왔다. 이 다리는 하천을 가운데 두고 나눠져서 살던 구씨 집안과 허씨 집안을 이어주던 다리였다.
두 가문을 이어준 다리처럼, LG(구씨)와 GS(허씨) 그룹의 분리가 마찰음 없이 마무리된 것이 명예회장 덕분에 가능했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GS그룹과는 처음에 합의한 대로 계열사를 나눴어요. 원칙에 따라 하니까 이의도 없었고, 다 행복해 합니다."
구씨와 허씨의 동업은 어떻게 출발했을까? "270년쯤 전에 진주 허씨 집안에서 구씨 집안으로 '딸을 시집보내겠다'고 했어요. 허씨 집안은 부자였죠. 이후에 양쪽 집안간에 결혼이 많았어요. 허씨 집안에서 아버지(구인회 창업회장)에게 돈을 맡기면서 키워달라고 했습니다. 선친께선 처음에 운수업도 하고 일본에서 숯을 수입해 팔기도 했지만 재미를 못 봤어요. 나중에 아마쓰 구리무(화장품 크림) 제품을 받아다 팔았습니다. 판매가 괜찮아 우리가 직접 만들었고, 화장품에 미국 여배우 사진(디아나 다빈)을 붙였는데 그게 히트쳤어요. 그 다음엔 화장품 통도 만들고 치약도 만들고 했지요. "
구 명예회장은 그룹 분리에 대해 "LG가 너무 큰 재벌이 돼선 안 되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번 기회에 LG그룹도 나눴어요. 선친과 함께 창업세대인 작은 아버지(구태회 전 LG 고문, 구평회 전 LG상사 회장, 구두회 전 호유에너지 회장)가 자신들 나이가 80세인데 자식들이 아직 사장이 안 돼 걱정하기에 분리를 하자고 하셨어요. 모두가 찬성하고 좋아했습니다."
구 명예회장은 기업을 하면서 가장 기뻤던 일로 매킨지 컨설팅을 받고 회사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꼽았다. "컨설팅을 받고 3년 정도 교육을 했는데 사원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어요. 이젠 밀고 나가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일을 꼽아달라고 하자, 얼굴이 굳어지면서 식은 녹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반도체를 잘하고 있는데 누가 욕심을 부려서 빼앗아갔어요. 자기 욕심 때문에 우리 반도체를 한번 먹어보겠다고 나선 겁니다. 소떼를 몰고 북으로 가고 돈을 쓰더니…. 우린 안 된다고 버티다가 결국 포기했어요. 그래서 정치적으로 얻어맞지는 않았지요."
그는 장남인 LG그룹 구본무(具本茂) 회장에 대해서는 "원래 장남은 잘해도 칭찬을 못 받는다"며 "저도 한 번이라도 아버지에게 칭찬을 듣는 게 소원이었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LG그룹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전자와 화학·통신 기업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통신 분야를 계속하느냐는 정부 정책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면서 "나라가 잘되려면 일본 총리가 정치 생명을 걸고 우체국 민영화를 추진했듯이 우리도 민영화를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오전 7시쯤 일어나 아침으로 요구르트와 삶은 달걀 2개를 먹는다. 오전에 공장 일을 하다 낮 12시쯤 교수들과 식사를 하면서 농장 일에 대해 묻고 토론한다. 오후에도 공장 일을 한다. 그는 "저녁 9시가 되면 졸려서 못 견딘다"면서 "하루종일 돌아다니고 잔소리를 해야지, 안 하면 사람이 팍 녹아 버린다"고 말했다.
구 명예회장은 얼마 전에 경기도 이천에 위치한 LG인화원 뒤편에 납골당을 만들었다. "땅도 모자라는 데 다 화장해야지요. 여기에 나를 포함해서 내 가족 100명 정도가 들어갈 겁니다."
그의 다음 계획은 어떤 것일까. "된장 공장뿐이오. 이것 가지고 죽는 거요. 된장 만들어서 온 가족들에게 나눠주고 인심 써야지."
(인터뷰=김영수 산업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