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6일 오후 6시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는 국내 화교(華僑) 상공인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중화총상회(中華總商會)’ 창립 총회가 열렸다. 한국화교경제인협회·중국교민협회·중화요식업연합회 등 40여개 단체가 참여하고 국내 화교 2만2000여명의 4분의 1인 5000여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국내 최대 규모의 화교 단체다.

이날 창립 총회에는 리빈(李濱) 주한 중국대사를 비롯해 중국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산둥(山東)성 르자오(日早)시, 하얼빈(哈爾濱)시 대표단 등 중국 정부 측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 중화총상회는 20억달러(약 24조원)의 국내외 화교 자본을 유치, 인천경제특구에 차이나타운을 조성하기로 했다. 내년 10월 서울에서 열리는 제8차 세계 화상(華商)대회를 계기로 해외 화교 자본을 적극 끌어들인다는 계획이다.

인천역 앞거리에 있는 중국의 장식용 건축물 '패루' 2000년 10월 인천시가 중국 웨이하이시로부터 기증받아 만든 것으로 이 일대에 화교들이 모여살고 있다

화상대회는 전세계 화교 기업인들이 2년마다 모이는 최대 규모의 비즈니스 행사다. 원국동(袁國棟) 중화총상회 초대 회장은 취임사에서 “한·중 경제 협력이 가속화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화교가 자영업에서 다양한 상공업으로 진출하는 ‘화상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화교들이 움직이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규제와 차별 속에 ‘이방인’으로 존재했던 화교들이 중국 열풍을 타고 힘찬 부상(浮上)을 꿈꾸고 있다. 흩어져 있던 화교 세력을 결집시켜 화교 비즈니스 기반을 구축하고, 한·중 협력의 창구 역할을 맡겠다는 것이다. 전세계 화교 기업인들은 끈끈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중화 경제권’을 형성하고 있다.

전세계에 퍼져 있는 화교들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유동자산은 2조달러(2400조원)가 넘는다. 하지만 한국에서만큼은 차이나타운이 발붙이지 못할 정도로 화교들의 힘은 미미했다. 이제 한국의 화교들은 중국음식점이나 한의원을 운영하는 잊혀진 소수(少數)가 아닌 중화 경제권의 첨병임을 선언하고 있다. 거대한 화교 경제권을 노크하고 있다.

화교 3세 왕충호(汪忠浩·23)씨는 2002년 고려대 이학부에 입학했다가 휴학하고 지난해 의대 외국인 특별전형에 합격했다. 왕씨는 “중국요리집은 할아버지 세대 얘기”라며 “내 친구들은 정보통신·생명공학 전문 분야를 비롯, 관심사가 다양하다”고 말했다.

인천 북성동·선린동 화교거리내 중국풍으로 장식한 음식점

지난해 한국에서 대학교에 진학한 한성화교고등학교 졸업생 91명 중 학생들이 가장 많이 진학한 학과는 경영학과(15명)였으며 그 다음이 호텔경영학과(12명), 의대·수의학과(9명) 등이었다. 한성화교학교 소상량(蕭相讓) 교무주임은 “대기업에 취업하는 학생들도 늘고 있다”며 “지난해 한성화교학교 출신 중 10여명이 현대그룹에 입사했다”고 말했다.

"중국 젊은이들, 한국 근무 선호"

화교들의 직업은 다양해지고 있다. 화교경제인협회가 회원들의 직종을 분석한 결과, 10여년 전만 해도 화교의 50%를 넘었던 식당업(중국음식점)은 지난해 말 현재 22.4%로 의약업(27.7%) 다음이었다. 무역·상업이 19.7%였으며 여행사 3.9%, 정보통신 2.6% 등 순이었다.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국으로 진출하고 있는 ‘신(新) 화교’들도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다. 서울차이나타운개발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양필승(梁必承) 건국대 사학과 교수는 “구한말~일제 때 뿌리를 내린 구(舊) 화교와 구별되는 신 화교는 상사 주재원과 유학생들이 주축을 이루며 현재 2만~3만명에 이른다”며 “이들은 높은 학력과 전문 기술력으로 무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원국동 중화총상회 회장은 “한국에 진출한 크고 작은 중국 기업은 3000개가 넘는다”고 말했다.

신 화교들은 중국 기업의 상사 주재원뿐 아니라 한국 기업에서 근무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1999년 베이징(北京) 어언문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으로 건너온 싱쥔(邢俊·28)씨는 한샘인테리어, 쇼핑몰 관련 벤처회사를 거쳐 2001년부터 SK텔레콤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SK텔레콤 CDMA(코드분할다중접속) 기술의 중국 마케팅 업무를 맡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일하고 싶어하는 중국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고 말했다.

2002년 SK가 뽑은 ‘중국인 공채 1기’ SK텔레콤 루슈광(陸曙光·32) 과장은 이번 달 베이징 지사로 나간다고 했다. 베이징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텔레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그는 “대우도 좋고 내 자신의 능력을 높이고 싶은 생각에서 한국 기업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화교들의 중국 진출도 활발하다. 양필승 교수는 “중국이 김치 수출국 1위가 된 데에는 중국으로 건너간 화교들의 역할이 컸다”며 “이들은 ‘중국인’이라는 배경과 한국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화교들은 김치 등 식료품, 여행업·무역· 의류업 등 다양한 분야로 진출하고 있다.

양 교수에 따르면 1970년대 한국을 떠나 미국 등지로 이민을 간 화교 중에는 우수한 인력이 많다. 한국에 살다가 해외로 이주한 화교는 미국·캐나다에 6만~7만명, 대만 2만~3만명 등 10만명 정도. 한국 화교 출신으로 미국 정계 진출에 성공한 샤르샹(沙日香) 전 미국 풀러턴시 시장이 부패 혐의로 중국 당국에 체포된 양빈(楊斌)을 대신해 북한 신의주 특구 행정장관으로 홍콩 언론에 거론된 것도 한국 화교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양 교수는 지적했다.

리빈 중국대사 "한국 중화총상회 최대한 지원"

양 교수는 “미국 실리콘밸리에 한국 화교 출신 과학자가 100여명 있다”며 “이들은 한국인이라는 정서가 강해 우리가 이들을 잘 감싸안으면 국가적으로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내년에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화상대회는 한국 화교의 도약을 좌우하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중국교민협회 왕수덕(王琇德) 부회장은 “한국 화교의 미미한 경제력만으로는 힘이 부친다”며 “해외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1월 중국 BOE그룹의 하이닉스 TFT-LCD(초박막액정표시장치) 부문 인수, 같은해 12월 중국 란싱(藍星)그룹의 쌍용자동차 매각 우선 협상자 지정 등 중국 대륙 자본의 한국 상륙이 본격화하고 있지만 화교 자본의 움직임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2001년 주룽지(朱鏞基) 전 중국 총리가 직접 화상 대회 유치에 나서 5000여명의 화교 기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난징(南京)시에서 대회를 열었다. 중국 정부는 대회를 위해 1조4000억원의 예산과 5000여명의 인력을 동원했다.

한국 중화총상회 창립 총회에 중국 정부 측 인사들이 참석한 것도 화교 자본에 눈독을 들이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중화총상회 관계자에 따르면 중국에서 직접 방한한 르자오시 대표단은 3만위안을 중화총상회에 기부했다. 리빈 중국대사는 “한국 중화총상회를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 역시 한·중 교류 확대는 물론, 화교 자본 유치에 도움이 된다는 판단 아래 화교들의 경제 활동 지원을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산업자원부는 내년 세계화상대회를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

현재 인천·일산 등지엔 차이나타운 건설 계획이 추진 중이다. 1883년 개항 이후 중국인이 모여들면서 한때 1만여명이 거주하기도 했던 인천 선린동·북성동 일대 1만1000여평이 올해 안으로 깨끗하게 재정비될 계획이다. 고양시 일산 한국국제전시장 부지 2만1000여평에도 5000억원 규모의 차이나타운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고양시에 따르면 내년 세계화상대회 개최 전까지 중국 문화의 거리(4000평) 중 일부가 건립될 예정이다. 서울차이나타운개발 측은 건설비 1억달러(약 1200억원)를 외자로 유치한다는 계획이며 이 중 상당액은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기로 했다.

인천·일산 등지에 차이나타운 건설 추진

화교에 대한 차별 정책이 상당 부분 개선된 것도 화교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있다. 1998년 법 개정으로 외국인의 부동산과 주식 소유가 자유화됐다. 법무부가 2002년 국내에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 영주 자격을 부여하기로 함으로써 화교들은 5년마다 체류 기간 연장 허가를 받아야 하는 불편함을 덜게 됐다.

하지만 화교들이 한국 사회에서 느끼는 벽은 여전하다.

지난해 1월 화교 3세 최모(23)씨는 차를 몰고 가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접촉 사고를 일으켰다. 하지만 경찰의 신원조회 과정에서 최씨는 신분 확인이 안 돼 ‘불법체류자’라는 오해를 받았다. 피해자 신분에서 입장이 180도 바뀐 셈이다. 2002년 정부는 국내 거주 외국인들에게 주민등록번호처럼 쓸 수 있는 외국인 등록번호를 교부했지만 전산망에 이들의 신상정보가 완전히 입력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최씨의 부모가 경찰서에 찾아와 여권을 보여준 다음 풀려났다.

왕충호씨는 “화교 친구들과 신촌에서 놀다 경찰의 신원조회를 받았는데 신원 확인이 계속 안되자 신분증을 위조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을 때는 황당하고 기분이 상했다”고 말했다. 화교들은 이메일을 사용할 때 대부분 ‘핫메일’을 쓴다. 다른 인터넷 사이트와 달리 등록시 주민등록번호 확인 절차가 없기 때문. 상당수 국내 기업체들은 외국인 등록번호를 인식하는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지 않고 있다. 싱쥔(邢俊)씨는 “인터넷에서 외국인 등록번호 인식이 안 된다고 할 때마다 전화를 걸어 설명을 하고 신상 정보를 팩스로 보내야 한다”고 했다. 한성화교학교의 한 교사는 지난해 아는 한국 사람의 명의로 휴대전화를 신청했다. 화교들에게 있어 신용카드 발급의 어려움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성화교중·고등학교 담도경(譚道經) 주임 교사는 “화교 학교는 교육부의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해 학생들이 한국 대학교에 입학하려면 외국인 특별전형에 응시해야 하는데 부모 중 한쪽이 한국인이면 응시할 수 없다는 정부 조치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고통받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학생들의 편법 입학을 막기 위한 이 제도 때문에 자녀의 대학교 진학을 위해 ‘위장 이혼’을 하는 화교 가정도 있다.

"세금낼 땐 한국인, 권리 주장하면 외국인"

부모가 이혼을 했을 경우에는 ‘외국인’ 자격을 얻게 돼 외국인 특별 전형에 응시할 수 있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담도경 교사는 “만 18세가 되면 국적을 선택할 수 있는데, 한국 국적을 포기하면 당연히 외국인 신분을 인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부모 중 한쪽이 한국 국적이라는 점을 들어 외국인 특별전형 응시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법적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이런 불편을 피해 졸업생의 3분의 1은 대만의 대학으로 진학한다고 이 학교 소상량 교무주임은 말했다.

화교 장애인의 경우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장애인 수첩’을 받지 못해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성공회대가 지난해 5월부터 7개월 동안 화교 69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해 지난 1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응답자의 77%가 취업단계에서, 79%가 승진에서 차별을 느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인이나 가족이 화교라는 이유로 취업이나 승진에서 직접 불이익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도 35%에 달했다.

화교 2세 왕국량(汪國梁)씨는 “납세 등 의무를 말할 때는 ‘한국인’으로, 우리가 권리를 주장하면 ‘외국인’으로 대우하는 이중 잣대가 빨리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한 화교 2세는 “월드컵 때 연희동 일대에 차이나타운을 만든다고 난리법석이더니 어느 순간 얘기가 들어갔다”며 “화교에 대한 관심도 잠시 들끓다가 식어버리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중화총상회 원국동 초대 회장


“세계 각국이 거대한 화교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혈안이 돼 있습니다. 한국은 어떻습니까?”

한국 중화총상회(中華總商會) 초대 회장을 맡은 원국동(袁國棟·사진) 화교경제인협회 회장은 “중화총상회는 친(親) 한국계”라며 “한국과 화교의 발전은 서로 같은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한 원 회장은 아버지가 산둥성 출신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다. 원광대 한의학과와 베이징대(北京大) 중의약대학을 나와 한의원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출판사를 차려 중국어 관련 서적을 출판하고 있다.

원 회장은 내년 서울에서 열리는 세계화상대회를 유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원 회장은 지난 몇 년 간 사비를 들여 세계 화교 모임에 참석, 한국 화교를 알림으로써 지난해 1월 강력한 후보지 일본을 제치고 개최권을 따냈다. 1991년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 주도로 처음 열린 세계화상대회는 전세계 화상들의 네트워크 구축과 이익 증진을 목적으로 2년마다 열리며 서울 대회에는 80여개국에서 40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특히 아시아 500대 기업 가운데 370개에 이르는 화교 기업의 총수들이 올 예정이다. 전세계 6000여만명의 화교를 대표하는 리더들이 대거 서울에 모이는 셈이다. 그는 “2005년은 한국 화교들의 신기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72년 중·일 수교 이후 일본 정부는 중국 유학생을 적극 유치, 현재 일본 내 화교 수는 50만명이 넘습니다. 일본으로서는 중국 내 반일 감정을 완화하고 중국의 우수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좋은 기회가 됐습니다.”

그는 “번듯한 차이나타운 하나 없는 한국에 대한 세계 화상들의 시선이 좋을 수만은 없다”며 “한국도 더 늦기 전에 세계 화교 네트워크와 연계해 화교 자본을 유치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원 회장은 “중화총상회는 해외 화교 자본 유치 외에도 중국음식점·한의원 등 소규모 자영업에 머물고 있는 취약한 한국 화교 비즈니스 기반을 구축하는 데 관심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류(韓流), 중국의 성장으로 화교들의 기대가 어느 때보다 큽니다. 화교들도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을 뒤로 하고 한국의 발전을 위해, 우리 자신의 발전을 위해 열심히 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