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현대산업개발 명예회장(72)은 "앞으로 1년만 더 부품업체 육성을 마무리짓고 은퇴하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빨리 물러나게 됐다"며 조기은퇴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그러나 "형님(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산업개발을 주신 데 고맙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본지 김영수 기자는 지난 10일부터 사흘간 서울 김포공항에서 제네바 모터쇼장까지 정 명예회장을 동행, 현대자동차 경영권 이양과 관련한 심경 고백을 들었다. 정 명예회장은 지난 10일 현대차 이사회에서 아들인 몽규 부회장과 함께 이사직에서 물러난 직후, 부인-딸과 함께 제네바로 출발했다. 현재 인도 마드라스 현대자동차 공장을 둘러보고 있으며, 오는 18일쯤 귀국할 예정이다.

그는 인터뷰 요청에 "조용히 살고 싶다. 할 말이 없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나 거듭되는 요청에 "이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지는 노병' 포니 정(정)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웃으며, 인터뷰에 응했다.

-- 현대차 사장에 선임된 지 33년 만에 물러나셨는데,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는지요.

"완전히 만족할 수는 없지요. 한 1년만 (자동차 경영을) 더 하려고 했지요. (현대)그룹 회장도 9년 했는데, 그때도 1년만 더 해서 10년을 채우고 싶었지만 빨리 그만두게 됐어요. 올해는 부품업체를 궤도에 올려 놓고, 손을 떼려고 했어요. 오늘(10일) 이사회에서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었지. 자동차에 관해서는 이제 대학을 졸업하고,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던 참이었는데…. 몽규도 올해초 디트로이트에서 세계적인 자동차 경영자와 막 안면을 익혔는데 아쉬움은 있어요. 구속중인 정태수 한보 회장이 임-직원을 가리켜 머슴이라고 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직원들에게 주인 의식을 무작정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돈 받고 일하는데, 어떻게 주인 의식을 가지라고 말할 수 있어요."

-- 현대차 지분을 모두 내놓고 현대산업개발을 받았는데, 불공평한 거래는
아닌지요. 또 형님에게 불만은 없는지요.

"우리 집안은 철저한 장자주의입니다. 정주영 명예회장은 제게 아버님 같은 분입니다. 누가 현대차의 기본을 만들고, 돈을 냈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디까지나 현대차는 형님 회사입니다. 제가 33년간 경영을 맡아 오너처럼 살아왔지만, 기본을 잊어본 적은 없습니다. 현대차는 누가 경영해도 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제 제 역할이 끝났습니다. 이 참에 현대차도 한번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젊고 용기 있는 사람이 한번 과감하게 변화를 일으켜야지요. 미련은 있지만, 넘겨줄 때가 됐다는 생각입니다. 형님 덕분에 화려한 경영자 생활도 했습니다. 명예스럽게 은퇴해서 행운입니다."

-- 스스로 물러난 것입니까. 아니면 외부 압력 때문인가요.

"전부터 현대차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경영자는 경영으로 평가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사회가 먼저 성숙돼야 가능합니다. 물러날 마음의 준비는 쭉 해 왔습니다. 그런데 저를 겨냥, 1조5000억원짜리 부품회사를 갖고 있다는 식의 음해성 소문이 자꾸 나왔습니다. 이때 '아! 이제 관둘 때가 됐구나'라는 느낌이 왔어요. 그래서 물러난다고 형님
께 말했지요."

-- 왜 현대산업개발을 택했습니까.

"처음부터 건설은 아니었어요. 그러나 자동차 계통은 완전히 떠난다고 결정한 후에 생각하니까 마음에 드는 게 건설입니다. 마침 형님이 현대산업개발을 해보라고 하셔서, 고맙게 받았습니다."

-- 현대차에 인생을 모두 바친 것을 감안하면 너무 작은 회사가 아닌가요.

"삼촌이 장자를 제치고 주력 기업을 이어받은 경우는 없습니다. 대한항공 조중건 사장, 롯데 신준호 회장, 쌍용 김석준 회장의 예를 생각해보십시오. 모두 동생이 경영을 한 셈이지만 주력 기업을 이어받은 경우는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9년간 현대그룹 회장도 지냈고, 현대차에 33년간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다 현대산업개발까지 받은 것에 형님께 고맙게 생각합니다. 물론 몽구 회장과 몽규가 함께 와서 '사촌끼리 합심해서 잘 하겠다'고 여러 차례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몽규에게 '같이 나가자'고 했습니다. 지금 잘 하더라도 다음 세대에서 똑같은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분란의 싹을 완전히 잘라야 집안이 평안합니다. 물론 이번 일로 몽규가 많이 상심했을 거예요. 그래서 마음을 잡고 경영에 몰두하도록 한 1년간은 일이 없더라도 아침 7시까지 회사에 출근하려고 합니다. 몽규 회장도 이제 점퍼를 입고 건설현장을 뛰어다닐 겁니다. 두고 보십시오. 산업개발을 1등 건설사로 만들 겁니다."

-- 현대차 임직원들이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완전 물갈이' 루머가 퍼져 있
는데요.

"몽구 회장을 모르고 하는 말이군요. 저는 아주 원리원칙에 충실합니다. 원칙에 어긋나면 절대로 안해요. 그러나 몽구 회장은 채찍과 당근을 함께 쓰는 유연한 스타일이지요. 이번에 현대차 임원들을 대거 승진시켰는데, 저는 승진에 매우 야박했어요. 몽구 회장은 넓은 도량이 있고, 주위에 좋은 참모가 보필하고 있어요. 혹시 회장이 잘못해도 주위에서 커버해줄 겁니다.

참모격인 이계안 사장과 몇 차례 얘기 해보니까 똑똑해요. 쓰는 말이 올바르고 믿을 만합니다. 또 보복성 인사는 말도 안돼요. 몽구 회장과 '현대차, 현대산업개발 사람을 막론하고 서로 사람을 빼가거나, 보복성으로 내쫓지 않겠다'고 합의했어요."

-- 현대차 이방주 사장과 김판곤 부사장은 현대산업개발로
데려 오셨는데요.

"저쪽(몽구 회장)에서 재무담당을 한명 데려갔으니, 나도 경리통인 이 사장을 데려와야 일을 하지요. 김 부사장은 같이 오래 일한 총무-인사통이니까 데려왔지요."

-- 수십억원대 퇴직금을 받을 것으로 아는데요.

"해외출장을 수백 차례 갔지만, 제대로 출장비를 받아본 적이 없고, 사실 얼마인지도 모릅니다. 출장갈 때 하루 일당은 비서도 모르더라구요. 오너라고 생각했는지, 매사 그렇게 넘어갔어요. 내 퇴직금이 얼마인지 잘 모르지만 받아봐야 아는 것 아닙니까. 한번은 이방주 현대차 사장이 와서 매출 12조인 회사에 기밀비가 고작 4억원밖에 안된다고 한탄을 하더라구요. 직원이 4만명이고, 경조사 비용만 4억원이 넘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한도까지 쓰고, 모자라면 안쓰는 거지'라고 했어요."

-- 한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에 대해 평가해 주시죠.

"대우자동차가 삼성자동차를 가져가면서 손해 안 보려는 것을 이해합니다. 현대차가 아산공장을 짓는데 6000억원 들어갔는데, 같은 크기의 삼성차 공장은 4조나 들었습니다. 그렇게 비싼 공장을 짓고 이익을 내려고 했다면 잘못입니다. 대우가 그런 공장을 가져가면서 계산을 철저히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결코 이익을 못내요. 현대차는 앞으로 부문(디비전)별 체제로 갈 것입니다. 현대차 기아 디비전, 울산 디비전 하는 식입니다. 기아 브랜드는 계속 쓰면서 기아 개성을 살린 차종으로 특화하는 방향입니다. 이제 자동차 이야기는 그만 하죠."

-- 앞으로 계획은.

"이번 여행을 마지막으로 모터쇼도 둘러보고, 내가 만든 해외 자동차공장을 보려고 한 것입니다. 내 자동차 인생을 한번 정리하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수상스키도 타고 등산도 다니면서 좀 쉬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