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외환위기는 심각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조만간 지불유예(모라
토리움) 사태까지 갈 조짐이다.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것은 우리 모두
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부나 정
치권 그리고 국민들도 당장 자신에게 닥친 문제가 아닌 양 여기는 경
향이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더니 이제 '설마'가 나라를 잡게 생겼
다.
그러나 '설마'하고 걱정하는 상황은 골목 모퉁이에서 우리를 기다
리고 있다. 기업 부도뿐 아니라 이제는 가계도 부도날 수 있다. 높은
이자 때문에 빚진 사람은 파산하기 마련이다. 기름과 전기가 부족해
엘리베이터도 멈추고 '한집에 한 등켜기'가 내일 모레 일이다. 원자재
를 사올 수 없어 생산이 중단되고 시장에는 물건이 동이나는 사태가
올 수있다.
우리에게 돈을 꾸어줄 입장에 있는 외국 특히 미국의 언론 논조를
종합해보면 그들이 여전히 돈주머니를 열지 않고 있는 이유를 세가지
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새 대통령당선자고 둘째는 재경원이고 셋
째는 한국 언론이다. 우리는 여기에 정치권을 포함시키고 싶다.
미국의 언론들은 김대중 당선자를 아직도 의혹의 눈초리로 보고 있
다. 22일자 월 스트리트 저널은 김 당선자를 가리켜 '인기주의자
(populist)', '예측하기 어려운(unpredietable) 정치인'이라고 표현하
고 그의 경제정책을 '근거 없는(unfounded)' 것으로 보고 있다. 심지
어 그의 측근들을 '인기위주의 국회의원과 좌파성향의 학자'로 규정하
고 있다. 미국 월가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이 신문의 이런 성격규정은
그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김 당선자와 그의 정부 그리고 한국에게 대
단히 불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언급이 불쾌하게 느
껴지지만 문제는 우리가 손을 벌리고 있는 신세고 그들의 협조 여하에
따라 우리나라는 파국의 갈림길에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또 김 당
선자로서는 '경제는 전임 정부가 다 망쳐 먹었는데 왜 내가 그것을 떠
맡아야 하느냐'는 억울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으나 지금 망가지고 있
는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대한민국이라는 엄정한 현실앞
에서 그는 보다 냉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김 당선자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했고 자신이 선거
유세때의 발언이나 생각을 일부 수정하는 등 방향선회를 하고 있다.경
제를 아는 그로서는 오늘의 현실을 외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월가가 그를 '말을 잘 뒤집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을 불식하기 위
해서는 결국 가시적인 조치들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투자자들의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풀기 위해서는 '말로 하는
약속'만으로는 안된다. 경제구조개혁을 위한 금융개혁법안을 IMF가 요
구하는 수준으로 당장 통과시키는 것이 우선 일차적으로 할 일이다.어
차피 처리할 것이라면 29일까지 끌 이유가 없다. 지금은 하루가 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김 당선자가 기왕에 언급한 정리해고 문제를 법적으
로 뒷받침하기 위해 노동법개정의 구체적 일정과 시한을 지금 곧 제시
하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것이다.
더 나아가 IMF에 떠밀려가지 말고 IMF협약보다 더 구체적이고 앞선
내용의 시장개방 일정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지금은 어차피
'시장이 실패'한 상황이고 또 결과는 그렇게 될 것이 뻔한 상황이므로
개혁조치들을 찔끔찔끔 하지말고 우리가 선도적으로, 집중적으로 과감
하게 이끌고 나가 극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 국익에 합당하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쟁점화된 것들도 과감히 실행에 옮겼으면 한다. 예를
들어 1∼2개 시중은행을 즉각 외국은행에 매각하는 것과 동시에 M&A절
차를 대폭적으로 완화하는 조치 여부도 서방투자가들은 눈여겨 보고있
다.금리가 30∼40%에 이르면 재벌들도 넘어갈 것이다. 그것을 막기 위
해서는 재벌들이 과잉투자 해외과당경쟁을 지양하는 자구 노력을 하도
록 유도해야 한다.
둘째는 김 당선자가 하루 빨리 새 경제팀을 구성해야 한다. 우선
경제 총수와 한은 총재부터 선보여야 한다. 지금 바로 두 사람을 임명
하고 내년 취임조각 때 유입시키면 된다. 이것은 개혁입법조치 못지않
게 중요하다.
지금 월가는 김대중 내각의 경제팀 면면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
다. 그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인물을 등용해서 그들의 김 당선자에 대
한 의심을 불식시키지 않는 한, 그들은 한국으로 부터 발길을 돌릴 것
이다.
김 당선자는 개혁입법조치를 취하자 마자 즉각 새로 임명된 두 경
제보좌관을 대동하고 뉴욕의 월가를 찾기 바란다. 우리의 대통령이나
당선자들은 미국에 가면 으레 미국 대통령을 만나야 하는 것으로 여겨
왔다. 이번도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자와 만나지 않는 전례를 내세우고
있어 김 당선자의 미국행이 무산되고 있다는데 굳이 클린턴을 만날 이
유나 필요가 없다. 발상을 바꿔 월가를 먼저 찾는 한국 차기 대통령의
실무적 태도를 미국의 조야는 오히려 신선한 눈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김 당선자는 모든 것을 인내해야 한다. 지금의 상황에
서 우리를 위기에서 구출해낼 위치에있는 사람은 김당선자 뿐이다. 돈
꾸어줄 외국 사람들이 그만을 쳐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정이
너무 급하다. 여기저기 눈치보고 체면 차리고 절차 따지다가는 우리는
무너질 수도 있다. 나라를 구하는 것 이상 더 큰 보람은 없을 것이
다. 김당선자는 부디 자신의 경제철학과 발상을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
하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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