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으시다면 최근 특히 더 힘들게 느껴졌던 상황이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지 조금만 더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최근에 이별을 겪으면서 많이 힘들었고, 학교생활도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부담으로 느껴지고 있어요."
이 대화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라 인공지능(AI)이 진료를 앞둔 환자와 나눈 것이다. AI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더니, 순식간에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과 생활 변화, 예상되는 잠재 질환을 정리해 냈다. 이어 의료진에게 "최근 수면 패턴과 식욕, 체중 변화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며 추가 확인할 사항을 제안했다.
KAIST는 전산학부 이의진 교수, 산업디자인학과 이탁연 교수 연구팀과 강남세브란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은주 교수 공동연구팀이 AI 기반 정신과 초진 면담 지원 기술을 개발했다고 24일 밝혔다. 연구 결과는 인간-컴퓨터 상호작용 분야 국제 학회인 'ACM CHI 2026'에서 발표됐다.
정신과 초진은 다른 진료보다 환자와 면담이 특히 중요하다. 혈액 검사나 영상 검사처럼 객관적 검사와 달리 언제부터 증상이 시작됐는지, 일상생활에 어떤 문제가 생겼는지, 수면이나 대인관계는 어떤지 등을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해야 한다. 환자가 처음 자신의 마음 상태를 꺼내는 데 부담을 느끼는 상황에서, 의료진은 제한된 진료 시간 안에 핵심 정보를 놓치지 않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연구팀이 개발한 AI는 정해진 질문지를 순서대로 읽는 문진 프로그램과 다르다. 환자의 답변을 정신건강의학 지식과 대조해 분석하고, 다음에 물어볼 질문을 스스로 정한다. 환자가 모호하게 답하거나 중요한 증상을 언급하면 관련 질문을 이어간다. 대화 과정에는 공감 표현, 환자 말을 다시 정리해 주는 '재진술', 불분명한 내용을 확인하는 '명확화' 같은 상담 기법도 적용했다.
AI가 수집한 내용은 의료진이 한눈에 볼 수 있는 임상 대시보드로 정리된다. 주요 증상, 기능 저하, 잠재적 질환 가능성 등을 구조화해 보여주는 방식이다. 의사는 진료 전 환자의 상태를 미리 파악하고, 실제 진료 시간에는 심층 상담과 진단, 치료 계획 수립에 더 집중할 수 있다.
연구팀은 1440명의 가상 환자를 만들어 성능을 평가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사례에서 30분 안에 핵심 임상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단일 질환 사례에서는 10~15분 안에 90% 이상의 정보 수집률을 보였다. 정신건강 전문가 19명을 대상으로 한 평가에서는 "초기 진단을 수행하는 수련의 수준으로 구조화된 정보 수집 능력을 갖췄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실제 환자 대상 임상 검증은 아직 남아 있다. 연구팀도 AI가 감정의 미묘한 변화나 개인의 복잡한 서사를 깊이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연구팀은 이 기술을 의사의 대체재가 아니라 반복적 정보 수집을 맡는 보조자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의진 교수는 "AI가 초진 단계의 부담을 줄이면 의료진은 환자와 더 깊이 있는 상담에 집중할 수 있다"며 "의료 현장에서 인간과 AI가 협력하는 새로운 진료 방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