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반도에서 조류 인플루엔자(H5N1)가 빠르게 확산되며 야생동물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됐다.
탐사선 오스트랄리스 연구진은 남극 반도 27개 지역을 조사한 결과, 조류 9종과 해양 포유류 4종에서 조류 인플루엔자 감염을 확인했다고 17일 밝혔다.
조류 인플루엔자는 조류에게 치명적인 호흡기 질환으로 2021년 10월부터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다. 현재 남극을 포함한 모든 대륙에서 보고됐으며, 세계동물보건기구(WOAH)에 따르면 2021년 10월 이후 2억8000만마리 이상의 조류가 폐사하거나 살처분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포유류와 인간 감염 사례도 증가하며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66명의 인체 감염 확진자가 보고됐으며, 올해 1월에는 첫 사망 추정 사례도 발생했다. 2023년 12월에는 변종 바이러스가 북극까지 퍼져 북극곰이 폐사한 사례가 확인되면서, 남극 생태계 역시 더 큰 위협에 직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연구진은 2023년 10월, 남극 대륙에서 첫 H5N1 감염 사례가 확인된 이후, 추가 감염 확산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올해 1월부터 6주간 남극 반도 27개 지역을 탐사했다. 그 결과, 조사 대상 27곳 중 24곳에서 H5N1 바이러스가 검출됐으며, 조류 9종과 해양 포유류 4종 등 총 13종에서 감염이 확인됐다. 또한, 살아있는 동물과 사체에서 채취한 864개의 샘플 중 188개에서 바이러스 양성 반응이 나왔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체가 발견된 동물은 도둑갈매기(스쿠아)다. 연구진은 남극 반도 남쪽에 위치한 마가리타 만에서만 172마리의 도둑갈매기 사체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도둑갈매기가 사체를 먹는 습성 때문에 바이러스가 빠르게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학계에서는 이번 H5N1의 확산으로 남극 생태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H5N1은 이미 다른 지역에서 심각한 피해를 일으킨 전례가 있다. 2023년에는 H5N1으로 인해 영국 인근에서 그레이트스큐어 개체군의 76%가 감소했으며, 같은 해 아르헨티나에서는 코끼리물개 약 1만8000마리가 집단 폐사했다.
연구진은 아직 남극에서 대규모 폐사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펭귄 개체군에서 높은 농도의 바이러스가 검출된 점이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남극 동물들은 밀집된 서식지에서 번식하고 서로 다른 종 간 접촉이 잦아 바이러스 확산 위험이 크다. 또한, 남극과 그 주변 지역에 서식하는 많은 종은 세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종이기 때문에, 감염이 확산될 경우 멸종 위험이 높다.
김정훈 극지연구소 책임연구원은 “펭귄이나 코끼리 물범 등 남극에 서식하는 포유류는 모여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아 H5N1이 퍼지면 집단 폐사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H5N1 확산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실제 규모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는 어려운 점도 문제다. 연구진이 조사하지 못한 지역이 많아 전체적인 피해 규모를 추정하기 어려우며, 해양 포유류의 경우 사체가 바다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많아 폐사 개체 수를 확인하는 것이 쉽지 않다.
김 책임연구원은 “남극 특성상 감염 개체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부터 방역 조치까지 모든 과정이 어렵다”며 “조류 인플루엔자가 더 확산될 경우 남극 연구 프로그램 자체가 중단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참고 자료
Science(2025), DOI : https://doi.org/10.1126/science.z4b7gwj